남우가 희주를 만나고 있을 때 선화는 아이스크림이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팔찌 이야기를 털어놓는 중이었고, 얘기를 나누던 중 선화의 오빠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던 것이다. 내 이름을 알게 된 선화는 오빠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오빠야가 얘기한 사람 이름이 임수빈이라 카던데, 맞나?"
"그래, 수빈. 맞는 것 같다."
"지금 마 같이 있다. 내 앞에 앉아 있다."
"진짜? 그라믄 쪼매 바꿔줘 봐라"
그렇게 둘은 떨리는 음성으로 첫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사실 떨리는 건 내 목소리 뿐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첫 통화는 그렇게 성사되었지만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이제 봐 ㅆ ㅓ 미암 몸이 좀 아조 아'
명희네 할머니께서 내어준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은 후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잠시 눈을 떠 휴대전화를 다시 켰을 때 메시지 창에는 내가 잠결에 입력한 자음과 모음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다행히 입력만 하고 전송 버튼은 누르지 않은 상태였다. 불필요한 걱정은 시키고 싶지 않아 다시 정상적으로 글을 또박또박 작성하여 보내주었다. 은유도 이제 안심이 되었는지 잘 쉬라며 지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안부를 대신했다.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희미했던 어제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미련스러운 내 모습에 부끄럽기도 하고, 일이 꼬여버린 것만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이제 희주의 얼굴은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친구를 잃은 대가로 하여 뭔가 대단한 일이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 기나긴 궁금증만 해결되었을 뿐이다. 이걸 위해서 그 난리법석을 피웠는지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또 나를 걱정해 주는 은유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더욱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서울에 있어야 할 내 몸뚱이는 삼일 째 이곳에서 지체 중이다. 임의로 추가한 개인 일정까지 포함하여 이번 일정은 그제 끝내야 했다. 일단 원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정리를 했고, 나머지 일들은 태한에게 떠넘겨 놓았다. 몸이 회복되었다면 바로 올라갔을 성격인데, 그만큼 몸이 안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내내 명희와 명희 할머니의 손길이 나를 챙겨주었기에 다행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몸이 조금 가벼워짐을 느껴 바닷바람이라도 쐴 겸 홀로 산책을 나갔다. 이곳 다랭이 마을도 이제 예전 같지 않게 유명해져서 사람이 북적거린다. 한 여름이라 그런가 7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남아있다. 길게 늘어진 사람들의 그림자를 따라 어렸을 적 다니던 코스를 거닐었다.
서서히 여행객들을 피해 갯바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바위 언덕까지 올랐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다가 멈춰 서서 멍하니 바다 위에 떠있는 섬들을바라봤다. 그러길 몇 차례 반복하던 어느 순간 돌아보니 사람들은 자취를 감췄고 나홀로 외진 길을 거닐고 있었다. 적막하고 고요한 찬 바람이 서늘하게 다가와 살갗을 간지럽혔다. 팔을 꼬아서 겨드랑이에 끼우고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불현듯 고개를 들어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는데, 그 바위 위에 낯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는 분명 안 보이던 검은 형상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서늘해진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닭살 돋친 채로 떨면서 다가갔다. 미동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 형상은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시간, 그때, 그 모습이었다. 단지 그 신장이 더 길어진 것뿐 다른 것이 없었다.
나는 그때처럼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누가 혹시라도 플래시를 뒤에서 비추며 나를 따라오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는 어렸을 때처럼 순간의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집념만은 매우 강했다. 오늘은 그때와 달리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서 그 형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게 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저기.. "
나는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뒤에서 손가락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말을 걸었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가까이 올 때까지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너무 잘 아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지?"
"왜? 여기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넌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너가 뭐야, 오빠한테."
"아니, 그게 뭐가 중요해. 왜 여기 있냐고, 언제부터 있었냐고?"
내 상태가 평상시와 달리 안 좋다는 것을 직감한 은유는 안부 메시지를 받고 나서 바로 그다음 날로 내려왔다고 했다. 피 같은 연차를 이틀씩이나 내고 가깝지도 않은 이곳 남해까지 말이다. 혹시 미리 얘기하면 오히려 자신을 되려 걱정할까 봐 아무 연락도 없이 내려왔단다. 그리고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옆에서 계속 지켜보며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내 옆에는 명희가 있거나 명희 할머니가 있거나 했는데, 누가 또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그는 조용히 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언덕에는 왜 있었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사실, 얼굴을 보는 순간 모르는 사람이 아니어서 안도하긴 했는데, 아는 사람이어서 실망할 뻔했어..."
"뭐라카노! 이 가스나가!"
은유는 산책을 나서는 나를 대신해혹시라도 추워질까 싶어 몰래챙겨 온 카디건으로 내 어깨를 감싸줬다. 그의 손을 잡고 비탈을 내려오며 이내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고 흐뭇한 미소만 머금은 채로 진지한 척 물었다. 내가 그에게 그 언덕이나 팔찌나 그런 얘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뿐더러 그 언덕을 아는 사람은 이곳에 살던 내 친구들 혹은 토박이 어르신들뿐인데 거기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많이 돌아다녔거든."
"그때 이 남해 바다 쪽 여수, 고흥, 남해, 거제까지 종종 돌아보곤 했었어"
"내가 중학생 때였으니까 넌 아마 초등학생이었겠다"
"그때 여기 다랭이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마을 전체를 다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이 언덕까지 왔던 거지"
"그러다가 해가 져서 노을 지는 풍경에 빠져 넋을 잃고 여기 바위 위에 서있던 적이 있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지어내고 있는지 기가 막혔다. 누구한테 어디서 들었는지, 갖다 맞춰 읊조리는 게 분명했다.
"허 참나, 누구한테 들었어?"
"듣긴 누구한테 들어, 진짜라니까"
"그럼 설마 그때 어떤 여자애가 팔찌 같은 거 주지는 않았고?"
"응, 그런 건 없었어. 아빠가 갑자기 없어진 나를 찾아다니느라 고생을 좀 하셨지"
"아하, 그러세요?"
나는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못하고 비아냥대듯 대꾸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아버지와 여행 다녔던 추억 얘기들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근데 여기가 너네 땅은 아니잖아? 나 뭐 출입 금지 구역에 있는 건가?"
"아니, 내 땅은 아니지만..."
그동안 미지의 사람을 동경하고 찾아다닌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슬프기까지 했다. 왜 내가 원하는 것들은 사라지고 없어지는 걸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실망과 원망의 마음들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히려 이제껏 눈만 뜨고 있었지 뭐 하나 제대로 보질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찾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