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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드디어 독립합니다

그런데 이제 캥거루족을 곁들인

by 양독자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혼자 산다고 완전한 독립을 이룬 건 아니다.

반대로, 같이 산다고 독립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물리적 독립’과 ‘정서적 독립’, 무엇이 진짜 독립일까?





가짜 독립 VS 진짜 독립



맑눈광. '맑은 눈을 가진 광인'의 줄임말. 초롱초롱한 눈빛 안에 정체 모를 도라이 기질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광기’ 하면 흔히 떠올리는 매서운 눈매, 거친 말투, 포효하는 감정은 그저 허세일뿐. 진짜 광기는 차분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을 동반한다. “저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예측 불가능한 대상은 상대를 불안하게 만든다.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의 예시로 사용된, 영화 <탑건>의 한 장면



독립에도 가짜가 있다. ‘가짜 독립’은 가짜 광기와 비슷하다. 겉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속 빈 강정이랄까. 욕실 곰팡이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날아오는 공과금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주기적인 이사와 임대차 계약을 성사시킨다. 언뜻 보기에는 꽤나 능숙한 자립이지만, 이건 서류상 세대주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독립’은 이런 게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진짜들은 여유가 넘친다. 맑눈광의 인자한 미소도 같은 맥락이겠지. 진정한 독립을 이룬 사람은 단단한 내면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밖에서 힘든 일을 겪더라도 집에서 자생이 가능하다. 아쉽지만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캥거루족이 되었다.





가짜는 반드시 티가 난다



명품 가방의 가품여부는 비 오는 날 판별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방이 젖을까 품에 안으면 '진품', 머리를 가리는 우산 대용으로 사용한다면 '가품'. 진짜와 가짜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체가 드러난다. 나의 독립생활도 그랬다. (적어도 남들에게는) 진짜처럼 보였던 나의 짝퉁 독립은 위기 앞에서 티가 나기 시작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거슬리던 시기였다. 상사가 무심코 던지는 업무에 화가 났고, 동료의 악의 없는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행동들이 점점 나를 자극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거야. 내 예측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길고 긴 지독한 장마였다.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능숙했지만, 버려야 할 감정은 분리하지 못했다.

옷에 뭍은 짬뽕국물은 감쪽같이 없앴지만, 남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지우지 못했다.

나의 가짜는 실용적이긴 했으나 실속은 없었다. 스스로를 다잡을 능력이 없는, 그야말로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다 울었니? 이제 독립을 하자!



10년간의 가짜 독립. 실패한 시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짝퉁가방도 가방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가? 나의 독립도 최소한의 역할은 해냈다. 그저 처음이라 미숙했을 뿐이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의 노력은 해왔던 시간. 그 안에는 분명 진짜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일단은 착실하게 살아온 나를 토닥여주자. 잔소리는 위로 다음에 와도 늦지 않다.




그래, 잘 알겠고!
너도 이제 ‘진짜 독립’을 해야지?


성공적인 재독립을 위해 지난 시간을 복기했다. 문제는 정신적 성숙을 동반하지 못한 물리적 분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심리적 독립을 선행하기로 했다. 아… 너무 빙빙 돌려서 말했나? 한 마디로 지금 당장은 캥거루족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우리 집에서 내실을 다져갈 계획이다. 차근차근, 안전하게, 부실공사 없이.


몇 숟갈의 집밥이면 허한 마음이 채워질까? 이대로 1년을 더 보내면 나아지려나? 한 해를 채우는 뚜렷한 사계절처럼, 내 마음에도 고유의 색채가 묻어나길 바라본다. 봄에는 풍성해지고, 여름에는 뜨거워지고, 가을에는 성숙해지고, 겨울에는 단단해지기를.





당신은 부모와 함께 사는 ’물리적 캥거루족‘ 인가?

아니면, 따로 살지만 심리적 의존도가 높은 ‘정서적 캥거루족’ 인가?

과거의 나는 후자였고, 현재의 나는 전자다.


물리적 독립도 독립이요. 정서적 독립도 독립이다. 물론 둘 다 이루면 좋겠지만, 하나만 이뤄냈다고 망연자실할 필요는 없다. 천천히 완전체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10년간 하지 못했던 미완의 자립. 캥거루족으로 살면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언젠가 탄탄해진 몸과 정신으로 맞이하는 순도 100% 독립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캥거루족,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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