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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1년 더 얹혀살기로 했다

캥거루족 17주 차

by 양독자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캥거루족이 된 날, 내 머릿속에는 큰 모래시계가 생겼다. 시계는 캥거루족으로 허락된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암시했다. 모래 알갱이들은 쉬지 않고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새 바닥에 쌓인 모래가 더 많아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다시 독립할 상태가 되어있지 않았다. 재독립에는 여러 준비물이 있다. 재정적 건전성, 육체적 건전성, 심리적 건전성 등. 그중 ‘심리적’ 영역이 한참 기준 미달이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쩔 수가 없군.

나는 끝이 보이는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기로 했다.





제가 내년에 백수가 될 예정입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는 1년 동안 무급휴직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나는 내년에 그 기회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작년부터 진지하게 고민해 온 일이었다. 1년을 쉬는데 1년을 고심한 셈이다. 오래 머뭇거렸던 이유는 여럿이 있지만, 그중 으뜸은 ‘돈’이다.


이실직고 말하자면, 캥거루족이 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휴직도 포함이었다. 수입이 끊기는 상황에서 가장 부담되는 건 '주거비'였고, 그 비용을 절감하는 효율적인 방법은 본가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캥거루족은 백수 라이프를 위한 보험이었다.


죄송하지만 부모님께는 처음부터 털어놓지 못했다. 내가 당신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얹혀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나를 가볍게 받아주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머지않아 다시 독립할 것처럼 굴었다. 나는 '위장 전입'을 했다.





제가 내년에도 캥거루족으로 살 예정입니다



"나... 회사… 1년만 쉬려고"


부모님의 당황한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몇 달 전, 내가 캥거루족이 되겠다고 선포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빠는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는 “응,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하는 듯 보였다.


화두는 휴직이었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백수로 지내는 동안 내가 여전히 ‘부모님 집‘에 머문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한 번 더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꼭 ‘전•월세 재계약’ 같았다. 2년마다 집주인에게 거주를 허락받던 시절이 떠올랐다.


계약 연장은 집주인과 세입자의 뜻이 맞아야 하지만, 특히나 집주인의 의사가 중요하다. 임대인은 보증금 올릴 수도, 전세를 월세로 전환할 수도 있다. 간혹 아무런 조건 없이 허락해 주는 집주인도 있다. 지금, 내 부모님처럼.





몇 달을 캥거루족으로 지내고 내린 결론. 아직 나는 밖으로 나갈 만큼 완벽한 회복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모래시계는 다시 뒤집혔고, 나는 1년이라는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다시 시작된 부모님과의 동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게 될까? 더 많이 싸우게 될까? 아니면 더 서로를 이해하게 될까? 어떤 방향이더라도 큰 흐름은 행복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그래서 말인데요.

염치없지만 조금 더 신세 좀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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