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16주 차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캥거루족이 된 지 다섯 달이 되어가지만,
그간 나는 부모님과 내가 하나로 묶여있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느끼게 된 계기는, 바로 ‘돈’이다.
살아보니 뭐든 애매한 것이 문제다. 죽도 밥도 아닌 위치가 가장 불리하곤 했다. 하지만 ‘밥’이 될 능력은 없다. 그렇다고 ‘죽’이 될 용기도 없다. 어쩔 수 없이 그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며 살아간다. 나도 그랬고,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집안 내력인가 보다.
아빠는 작년에 기초연금을 신청했다가 탈락했다. 기준치를 살짝 넘기는 ‘애매한‘ 소득이 문제였다. 남들은 퇴직하고 쉬는 나이에 먹고사는 생활비가 필요해서 돈을 버는 게, 모순적이게도 자격미달의 원인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기초연금의 ‘기’ 자만 들려도 부모님은 기염을 토했다.
얼마 전, 나라에서 경기 활성화를 목적으로 ‘소비쿠폰’을 발행했다. 시작부터 말이 많았던 정책이다.
아까운 세금으로 돈을 왜 주냐!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냐!
누구는 더 주고, 누구는 덜 주냐!
웅성거리는 주변과 달리 부모님은 평온했다. 혜택의
사각지대에 속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그들은 불만은커녕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번에도 탈락할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전 국민에게 지급된 1차 소비쿠폰과 달리, 2차 쿠폰은 상위 10%를 제외하고 전달된다. 애매한 연봉을 받는 나는 항상 대국민 이벤트에서 예선탈락이었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배제될게 뻔했다.
세금은 더 내고 혜택은 덜 받는, 마더테레사 급 희생을 강요받는 게 억울했다. 집이 없어서 부모님께 얹혀사는 캥거루족. 차가 없어서 지옥철을 벗어나지 못하는 뚜벅이. 이런 내가 도대체 왜! ‘무자산 고소득’ 자는 나라를 위한 ATM기계인가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차 지급은 개인이 아닌 ‘가구’ 기준이란다. 갑자기 뒤통수가 싸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지급기준을 살펴봤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은… 우리 부모님이 돈을 못 받는다는 거네? 나 때문에?
“엄마, 아빠… 이번 소비쿠폰은 못 받을 거야. 아마도”
이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다가 사레들려서 ‘하마터면 죽을뻔했네’ 하고 호들갑 떠는소리냐! 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두 사람. 집에 들어온 애매한 자식 때문에 애달픈 상황이 생겨버렸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1인 가구’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독립’해 지냈던 10년의 시간 때문에. 함께 살지만 경제적으로는 ‘독립’된 환경 때문에. 머지않아 곧 다시 ‘독립’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독립’이라는 키워드를 방패 삼아 나를 그들과 분리시켜 놓았다.
정서적 개념의 ‘가족’을 넘어, 서류상 ’가구‘로 한데 묶인 지도 벌써 수개월. 나는 이제야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가족이나 가구나 그게 그거아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법적인 규제와 복지 앞에 우리는 한 배를 탄 구성원이 된 것이다.
다시 부모님에게 소속되었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이기 민망할 정도로 낯설었다. 처음 내가 (무주택) 세대주가 되어 홀로 섰을 때만큼이나 그랬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음산한 숲 속을 거닐다가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비쿠폰 신청 당일, 민생회복의 마중물은 끝내 우리 가족을 맞이해주지 않았다. 대상자가 아니라는 안내문구에 굴하지 않고, 엄마는 무려 세 번이나 신청을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 거절. 전산오류가 아닐까? 하는 그녀의 희망은 부스러기처럼 잘게 흩어졌다.
“엄마, 아빠! 소비쿠폰? 그거 내가 줄게”
기꺼이 나를 배에 태워준 그들을 위해,
이번 추석에는 용돈을 10만 원씩 더 넣어야겠다.
당분간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