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15주 차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30대가 넘어가면,
다양해진 삶의 방향처럼 대화의 주제도 세분화된다.
결혼을 했다면, 배우자와 자식
재테크에 관심이 있다면, 부동산과 주식
직장인이라면, 상사와 부하직원
그리고 캥거루족이라면? 부모님
그렇다.
우리는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한다.
간만에 나의 오래된 친구 M양을 만났다. 그녀는 나와 같은 캥거루족이다. 초보 캥거루인 나와 달리,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캥거루가 아닌 적이 없던 ‘모태 캥거루’다. 지금은 본인 자가에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우리 종족의 최고 레벨, 그녀는 ‘탑티어(Top-Tier)’ 캥거루족이다.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그녀를 만나자 그간 마음속에 담아둔 애로사항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엄마는 왜 그렇게 홈쇼핑에 빠져있는 건지. 아빠는 왜 그렇게 고집불통인지. 함께 살다 보니 납득되지 않는 것들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물론 나도 안다. 얹혀사는 처지라면 품어선 안 되는 감정들이란 걸. 그래도 한 번은 쏟아내고 싶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M양은 돌고래를 능가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물개보다 빠르게 박수를 쳤다. 제스처만 봐도 그녀의 공감수치가 단박에 느껴졌다. 순간 몇 달간 묵혔던 체증이 쑥 내려갔다. 누가 내 위장에 사이다를 콸콸 들이부은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이해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갈증이 해소됐다. 오늘 동종업계 종사자를 만난 건 신의 한 수였다.
한참을 깔깔거리며 부모님 뒷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우리가 적지 않은 나이가 된 만큼, 그들도 꽤나 늙었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비록 대화의 시작은 불평과 불만이지만, 그 끝은 항상 ‘연민’으로 마무리된다.
오래 건강하길, 오래 행복하길, 오래 함께하길. 하지만 인간의 생은 유한하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다만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일상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빌붙어 살고 있지만 민폐는 끼치지 않는 캥거루. 다른 자식들보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캥거루.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살피는 캥거루. 이런 자식이 또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우리밖에 없지? 이렇게 또 정신승리를 해본다.
든든한 남편, 자랑스러운 자식, 욕하고 싶은 시월드.
무엇도 없는 나는 부모 이야기를 한다.
물론 칭찬보다 험담이 많다는 게 문제지만...
‘팬’이 무한한 애정과 응원을 보내는 존재라면,
‘안티팬’은 그들보다 더 지대한 관심을 쏟는 존재란다.
나는 어쩌면 부모님의 안티팬일지도?
그래도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
오늘도 여전히 잔소리를 가장한 악플을 단다.
“엄마! 이걸 왜 샀어? 난 정말 이해가 안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