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13주 차
독립한 지 10년 만에 돌연 캥거루족이 된 30대 자식입니다.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엄마, 할머니한테 다녀올게”
1년에 2번, 엄마는 할머니를 뵈러 부산에 간다. 기간은 대략 일주일. 지난겨울에 다녀왔으니, 이번 여름에
갈 차례가 된 것이다.
내가 본가에 들어온 후, 그녀는 간단한 약속이나 볼일을 제외하고는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제대로 된 엄마의 첫 외출. 드디어 ‘나 홀로 집에’ 있을 기회가 찾아왔다.
엄마는 집에 남게 될 아빠와 내가 걱정됐는지 쉽사리 떠나는 날짜를 결정하지 못했다.
“전혀 그럴 필요 없어~ 마음 편히 다녀와~ 더 길게 머물러도 괜찮아~”
아빠와 내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루빨리 자유를 만끽하고픈 부녀의 이심전심. 우리는 통했다. 엄마는 가자미 눈을 뜨고 우리를 째려봤다.
만약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어린 왕자 -
화요일에 떠나는 엄마를 생각하니 월요일부터 신이 났다. 집에 엄마가 있으면 불편해서? 아니다. 반대로 엄마가 없으면 편해서? 역시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부재는 나를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이 마음을 ‘불효’라고 정의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잠시 불효녀가 되는 수밖에. 후후.
드디어 오늘, 엄마가 집을 나간다. 나는 집에서 철저히 혼자가 될 예정이다.(아빠는 격일근무라 오늘 집에 계시지 않는다.) 벚꽃이 피어나듯 마음이 설렌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절대 부모님이 없어서 신난 게 아니다. 아무도 없어서 즐거울 뿐이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한 캔만 사려고 했는데 1+1이다. CU도 나의 해방을 축하해 주는 게 분명하다. 시원함을 넘어 차가운 맥주캔을 양손에 들고 집에 들어왔다. 조용하고 깜깜한 집.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독. 그래, 이 맛이야! 나는 재빨리 맥주를 냉동실에 넣었다.
개운하게 씻고 나서 아까보다 더 차가워진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몽롱해졌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겼다. 내가 사온건 ‘무알콜 맥주’인데… 설마 이거 마시고 취했나? 시계를 보니 취침시간이 지났다. 알코올이 아니라 졸음이 문제다. 이대로 잠들기는 아쉽지만 출근을 앞둔 직장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자유보다 잠이 우선이다.
퇴근 후에 생기는 한 시간 남짓한 자유는 감질맛이 났다. 질적으로는 완벽했으나 양적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물리적인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아끼던 아이템을 꺼냈다. 직장인에게 황금보다 귀하다는 휴가를, 그것도 무려 3일이나!
휴가를 낸 김에 집에 있던 적은 있지만, 집에 있기 위해 휴가를 쓴 적은 없었다. 피 같은 연차를 이렇게 허비하다니. 결재를 올리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낭비 없는 낭만’이 어디 있으랴. 이렇게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암~ 얼마든지!
‘넷플릭스에서 뭐 보지?’
‘야식은 뭐 먹지?’
지금을 완벽하게 즐겨야 한다는 원대한 목표가 생겨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은 생겼지만 여유는 사라져 버렸다. 결국 일정은 계획과 다르게 흘러갔다. 끝까지 집중해서 본 영화도, 맛있게 먹은 배달음식도 없었다. 하지만 휴가가 헛되이 쓰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런 아쉬움도 언제 다시 누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휴가가 끝나갈 즈음,
희한하게도 조용한 집이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라던 순간이 고작 3일 만에 힘을 잃다니.
‘작심 3일’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자성어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 아니라
‘엄마가 집을 떠나면 개고생’이다.
엄마가 돌아오려면 며칠이나 남았더라…
여전히 평온한 이 공간에 허전함이 느껴졌다.
“잘 지내고 있지?“
괜스레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