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아침 식사는 방송에서 봤던 걸로
어제 하루는 버스에 비행기, 그랩 택시를 타고 이동하며 보냈다. 모든 여행의 첫날은 항상 그렇다. 숙소에 밤 8시 이후에 도착해서 셀프 체크인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쉬운 것은 냉장고가 없다는 것. 숙소가 저렴하고 깔끔한 대신 그건 좀 많이 아쉬웠다. 첫날밤을 푹 쉬고 나서 페낭에서의 하루를 시작한다. 페낭힐과 거니 드라이브, 바투페링기는 이번에 그냥 제치기로 했다. 이틀을 꼬박 조지타운으로만 채울 예정이다. 계획 없이 시작한 여행에 뚜벅이 여행자, 그리고 조금은 게으를 수밖에 없는 저질체력 탓에.
오늘 아침식사는 '스트리트푸드파이터-페낭'에 나온 로띠와 커리를 먹기로 했다.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내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천천히 걸어서 가는 걸로. 가는 길에 페낭 바자르가 있어서 아침 시장 둘러보기에 좋다. 우리나라는 지금 칼날 같은 추위가 휩쓸고 있지만 이곳의 온도는 29도 이상에 습도도 꽤 높은 편이다. 첫날은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중국 분위기 가득했던 길을 지나 큰길을 건너 구글맵을 따라 식당에 도착했다.
역시 TV에서 보았던 이들이 로띠를 굽고 있었고, 나이 든 아주머니가 서빙했다. 플레인 로띠와, 양파가 들어간 로띠 바왕, 비프커리 하나를 주문하고 아이스커피 하나. 떼따락은 그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못 마셨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커리 색이 좀 달랐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치킨커리라고 하길래 비프커리라고 다시 얘기하니 곧 바꿔주셨다. 우리의 카레보다는 붉은색이 더 강하고 맛은 더 자극적인 수프에 쇠고기 한 조각. 결이 잘게 찢어져서 먹기는 편했다. 플레인 로띠는 그냥 담백했고 로띠 바왕은 사각이며 씹히는 양파맛이 익숙하고 좋았다. 커리는 아침에 먹기엔 조금 자극적이긴 했지만 매운 음식이 익숙한 한국인들에게야 뭐.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부터 조금씩 덥다. 그리고 페낭은 섬이라 조금 습하기도 하다. 그래도 겨울이어서인지 기온과 습도가 한여름 같지는 않아서 다닐만하다. 어제 그랩 운전기사가 말해준 대로 일요일 쿠알라룸푸르행 버스표를 예매하러 갔다. 온라인으로 예매해도 되지만, 어차피 콤타르 타워로 갈 예정이어서 이쪽으로 와 보았다. 매표는 콤타르 타워가 아닌 프라나긴 몰 1층에 위치해 있는 여행사들에서 대행하고 있다. 환전소 표시가 가득해서 처음엔 사설 환전소인 줄 알고 그 앞에서 헤매다가 결국 콤타르 타워 안내 직원한테 물어보게 되었다. 그 환전소 표시가 되어 있는 곳에 여행사가 있었다. 그중에서 인도인 여자분이 앉아 계시는 여행사로 들어갔다. Billion Stars라는 여행사였고 이곳에서 일요일 오후 두 시에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처음에 그 여자분이 예약하는 날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걸로 이해해서 아니라고, 이틀 후인 일요일이라고 다시 말해야 했다. 그녀가 이미 출력한 영수증에 날짜를 수기로 수정해 주었기에 그녀에게 몇 번 확인했다. 이러다가 오버부킹되는 거 아니냐고. 그녀는 아니라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버스로 쿠알라룸푸르까지는 5~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버스표를 사고 나서 이제 콤타르 타워 더 톱 페낭으로. 그런데 더 톱 페낭 입구를 몰라서 다시 콤타르 타워 안내 직원의 도움을 받았다. 안내 데스크 건너편 무지개표시가 되어있는 레인보우 스카이워크로 들어가니 안내직원이 6층의 매표소로 가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가, 더 톱 페낭 빅 5 티켓을 구입했다. 콤타르 타워 전망대와 스카이 워크, 수족관과 쥐라기 공원 탐험이 포함된 티켓이다. 68층의 전망대까지 빠르게 올라가서 페낭 섬의 모습을 즐기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서니 오금이 저릴 정도다.
더 톱 페낭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무지갯빛 치즈 토스트와 수박 주스 한잔. 페낭 섬 풍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간식 먹기 좋았던 곳이었다.
다시 나와 스카이워크를 겪어보러 간다. 안전 요원이 나를 포함한 네 사람에게 보호장구를 챙겨 입히고 짧은 스카이워크를 경험하게 한다. 고소공포증은 다소 없는 편이어서 스카이워크는 그저 가벼운 산책 정도였다.
스카이워크를 경험하고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콤타르 타워 안의 수족관 관람. 소규모의 아기자기한 수족관은 가볍게 산책하기 좋았다.
빅 5에는 생뚱맞게 쥐라기 공원이 포함되어 있다. 어린애들이라면 재미있을 공룡모형들과 공룡화석 발굴, 화석 모형들이 있다. 콤타르 타워가 솟아있는 그 아래에 공룡모형이라니. 우습기는 하지만 가볍게 산책하는 걸로.
여행 안내서를 대충 읽어서인지 페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다. 네이버와 구글이 너무 잘 도와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공통으로 추천된 곳은 페라나칸 맨션이었다. 페라나칸은 18세기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이주해 온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페라나칸 남자는 바바, 여자는 뇨냐라고 부른다. 그 독특한 문화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 바로 페라나칸 맨션이다. 페낭의 페라나칸 맨션은 그린 맨션이라 불린다. 외관이 정말 눈에 띄는 독특한 초록색, 아니 짙은 민트색이라 해야 할까.
이곳은 투어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영어로 투어를 진행하는 현지인은 자기를 바바라고 소개했다. 그 역시 페라나칸이었던 것이었다. 집의 내부는 화려했고 그 소장품들도 멋졌다. 보석과 장신구류, 귀한 도자기와 각종 물건들은 모두 고급스러웠다.
장신구가 있는 방에는 그리스 여인의 흉상처럼 생긴 마네킹에 다이몬드와 에메랄드로 장식된 화려한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결혼식 같은 행사나 대외적인 과시의 목적으로 착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 목걸이보다 더 눈에 띄었던 장신구는 터키석 같은 푸른 목걸이와 머리장식이었다. 오묘한 푸른색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이드가 그 푸른 부분을 확대하여 촬영해 보였는데 준보석이 아니었다. 실처럼 보인 그것은 물총새로 번역되는 킹피셔(kingfisher)의 깃털이라 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물총새의 깃털을 사용하는 이 공예는 명청시대에 성행했으며, 건륭제 시기에 최고 수준을 자랑했던 '점취(点翠)' 공예로 원래는 궁중과 귀족 가정에서 사용되었으나 청나라 말기에는 부유한 일반 가정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혼수품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이 공예에 사용된 물총새 깃털은 새가 살아있을 때 뽑아내어야 그 윤기가 흐른다는 제작 과정의 잔인함이 알려졌고 또한 물총새가 보호조류로 지정되면서 대체품으로 거위 같은 새의 깃털을 염색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스다운, 덕다운의 경우에도 새가 살아있을 때 털을 뽑아야 그 따뜻함이 유지된다는 것이 알려져 그 비윤리적 체취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 장신구 역시 그렇다 하니 저 오묘한 푸른색은 물총새의 처절한 비극적 증거라 해야 할까.
페라나칸 맨션 투어를 끝내고 조지타운의 유명한 벽화를 찾아가기로 했다. 오래된 거리를 천천히 걷는 즐거움은 사거리에서 만난 레고 블록 장난감 같은 예쁜 건물을 보며 더 부풀었다. 소방서라 쓰여진 이 건물은 190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열려있는 1층은 과거 소방서에서 사용한 물품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소방서를 뒤로 하고 똑바로 걸어가다 보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가는 곳이 있다. 바로 페낭의 상징 같은, 자전거 타는 아이들의 벽화가 그려진 담장 앞이다. 많은 이들이 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감히 사진 찍으러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렇지만 다음날 사람들이 좀 적을 때 앞에 있었던 여학생들에게 부탁하여 인증샷을 남겼다). 거리 악사의 버스킹 연주 음악이 흐르는 그 길은, 우리의 음력설에 해당하는 중국 춘절 장식이 가득하다. 말레이시아는 중국 화교 비율이 높아서 춘절을 꽤 크게 기리나 보다.
조금 더워서 시원한 간식 즐길 시간. 식용색소 듬뿍인 얼음덩어리 레인보우 아이스볼을 주문했다. 색깔은 예뻤으나 얼음덩어리에 색소시럽을 입힌 맛이라 시원함만 즐기는 걸로.
페낭 조지타운은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곳이다. 물론 여기저기서 들리는 여러 나라의 언어들, 특히 성조로 인해 더 시끄럽게 들리는 중국어로 인해 생각에 잠겨 걷는다는 것이 조금 모순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작은 골목 안에 우산이 가득 펼쳐져 걸려 있었다. 이 작은 골목에도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서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이 많다.
벽화들을 보다가 '엽(葉)'자가 적힌 건물이 보였다. 얍콩시라 불리는 이곳은 남중국에서 이주해 온 얍[葉]씨 가문의 사당이다. 가이드북에 소개가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굳이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갔어야 했을까...?
얍콩시를 뒤에 두고 정면으로 난 길을 조금 걷다 보면 페낭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카피탄 켈링 모스크를 만나게 된다. 미나렛이 예쁘게 서 있는 이 모스크를 보니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뚜벅이 여행자일 경우, 걷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과하게 걷는 것을 선택하곤 한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아직 몸이 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면 더 걷는 편이다. 바닷가 쪽 빅토리아 여왕 시계탑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 시계탑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페낭 통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계 백만장자가 건립했다고 한다. 1897년에 완공된 이 시계탑은 건립 당시 여왕이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불발되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탑 근처의 정부 청사를 파괴하려 했던 폭탄의 영향으로 약간 기울어졌다고 하는데 볼 때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까지 왔더니 카페인이 절실하다. 부근을 검색하니 추천된 카페는 Constant Gardener였다. 화장실이 없는 이 카페는 일반적인 카페였다. 주문한 것은 오리지널 세트였던가 싶은데 드립커피, 에스프레소, 라테가 한잔씩 제공되는 것이었다. 이 저녁에 카페인을 냅다 들이부어도 좋을까 싶지만. 커피는 딱 적당히 내가 원하는 맛이었다.
카페에서 나오니 어느새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붉은색의 중국등에는 빛이 밝혀졌고, 페낭에서의 두 번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최대 단점 중 하나가 음식을 꽤 가린다는 것이다. 특히 낯선 재료와 낯선 음식을 선뜻 잘 먹지 못하는 데다가 생선 비린내, 고기 누린내를 잘 참지 못한다. 그래서 야시장의 먹거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다. 그리고 오늘도 어마무시하게 걸어 다닌 상태라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 숙소에 간식이 없으니 편의점에 들러 무엇인가를 사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세븐 일레븐. 그런데 편의점 진열대를 보니 여긴 어디...?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편의점과 똑같은 그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대략 구입하고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 충분히 돌아다녔다. 야시장을 좋아하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스타일은 아닌 걸로. 페낭의 두 번째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