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듯 오래되지 않은 듯한 도시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사흘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한국에서 예약했던 말라카 투어를 떠나는 날. 숙소 앞에서 픽업하기 때문에 예정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내려왔다. 그런데 숙소 입구에 벌써 투어 가이드가 와 있었다. 투어 신청 확인을 끝내고 밖에 나가니 소형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버스 안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한 팀이 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픽업하면서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투어 인원은 열두 명, 기사와 가이드까지 총 14명인 소규모 투어라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말라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차로 약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두 시간 동안 가이드는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말라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준다. 450여 년의 식민지 생활로 인해 자신들만의 역사나 문화 유적보다는 식민지 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말라카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말레이 반도에서 번성했던 국가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말라카는 투어로 일찌감치 선택해 두었던 것이었다.
말라카는 14세기 경 수마트라 섬에서 건너온 파라메스바라 왕자가 세운 왕국의 수도로 그 지리적 이점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15세기 초반 명나라 환관이자 장수 정화의 원정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중국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중국과 말레이 문화가 섞인 페라나칸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투어의 시작은 쳉훈텡[靑云亭] 사원이다. 앞서 말한 정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원으로 명나라에서 들여온 자재로 사원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원은 중국의 음력설인 춘절을 기념하기 위해 홍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원 뒤편에 조성된 작은 동산이 이채로웠다. 사원 입구에는 두 마리의 용이 입속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이것을 돌리며 소원을 빈다고 한다. 그렇게 돌리다가 여의주를 빼내면 큰 행운이 온다는데, 쉽게 빠지지 않을 듯.
쳉훈텡 사원을 나와 조금 걷다 보면 이슬람 사원인 캄풍 클링 모스크를 만나게 된다. 이 모스크는 18세기에 인도계 무슬림에 의해 세워졌고 19세기에 수마트라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모스크 안쪽 넓은 공간에는 묘지가 마련되어 있고, 그 중앙에는 망고나무가 크게 서 있다. 이곳의 망고는 크고 신선하다는데 그 위치가 묘지 위이다 보니 조금 야릇하다.
캄풍 클링 모스크 옆으로 벽화 마을 쪽으로 걷다 보면 색색으로 장식된 힌두 사원을 지나가게 된다.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냥 사진을 찍어보는 걸로.
벽화 마을은 페낭과는 조금 다른 듯 예쁘다. 페낭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덜해서 더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벽화 마을을 지나서 모퉁이를 돌아 나오니 아름다운 운하가 펼쳐진다. 마치 작은 베니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말라카의 운하는 운치 있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말라카 차이나타운의 중심 거리는 존커 거리(Jonker Walk)라 불린다.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북적하다. 쇼핑을 하기에 적절한 곳이라 하는 편이 나을까. 이곳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존커 거리를 뒤에 두고 운하를 건너면 더치광장과 만난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였던 17~18세기에 세워진 건물과 시계탑, 분수대로 인해 건너편의 차이나타운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광장에 자리한 적갈색의 시계탑은 19세기 중국계 거상 탄벵스위가 세워 탄벵스위 시계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더치 광장이라는 이름답게 모형 풍차도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네덜란드 총독 공관이었던 스타더이스(The Stadthuy's),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벽돌로 만들어진 그리스도 교회,1901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인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빅토리아 여왕 분수, 아치형 회랑이 있는 말레이시아 유스 박물관이 독특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더치 광장 뒤쪽의 계단을 올라 세인트 폴 언덕으로 간다. 이곳에는 1521년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가톨릭 교회인 세인트 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벽체만 남아있게 된 것에는 개신교를 믿은 네덜란드와 국교회를 지닌 영국의 공격 탓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 앞에는 하얀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는 동양에 가톨릭을 전파한 선교사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이다.
올라온 길과 반대로 내려가면 관문만 남아있다고 하는 산티아고 요새를 만나게 된다. 그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서 운치 있는 느낌이다.
이제 버스를 타고 해상 모스크 쪽으로 간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 위에 떠있는 사원처럼 보인다는데 오늘은 구름 낀 하늘 아래 독특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말라카 리버 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식사는 중식당에서 다 함께 맛있게 먹었다. 끝나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더치 광장에 위치한 리버 크루즈 승선장으로 왔다. 약 50분가량 걸리는 크루즈를 타고 말라카 운하를 살짝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투어의 마지막은 색색 장식과 등으로 꾸며진 자전거 인력거 타기. 밤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말라카로 떠난 소그룹 투어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말라카를 다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곳. 또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 안녕, 말라카.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