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15세기 경)-강희안
15세기 문인 화가 인재(仁齋)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15세기 경)>. 깎아지른 절벽을 뒤로 하고,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의 바위. 마치 물을 바라보기에 아주 좋게 깎인 듯한 바위에 은은한 미소를 띤 선비가 팔에 기대어 물을 바라본다. 물은 아마도 멀리에서는 세차게 흘러오다가 선비의 앞에서는 거짓말처럼 잔잔하게 돌아흐르고 있다. 그 고요한 물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물멍'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 주는 듯 하다.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는 제목의 그림 속 선비는, 우리나라 선비의 복장은 아니다. 이는 명나라 초반부에 나타나서 조선중기 미술에 영향을 미친 절파 화풍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그림처럼 인물이 부각되고 산수 배경이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묘사되는 '소경산수인물도'는 조선 중기 산수인물도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배경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우리 조상들이 선호한 탓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생각보다 매우 작은 그림이다. 23.4㎝×15.7㎝의 그림이, 오히려 웅장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그림에 표현된 여백과 자연스레 뻗은 나뭇가지, 거칠지만 편안한 느낌의 바위와 '물아일체(物我一體)'된 선비의 고고한 표정 탓은 아니었을지.
조선 중기 문인 인재(仁齋) 강희안은 시, 서화, 글씨에 능하여 당시 '삼절(三絶)'이라 불렸다고 한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한 그는, 소박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으며,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해 젊어서부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그리 고요한 시기가 아니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조카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였던 시기이며,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사육신이 처형을 당했던 시기이다. 강희안 역시 이에 연루되었으나, 사육신 중 하나인 성삼문이 그의 무고함을 진술하여 석방되었다. 세조 즉위 후 새로이 주조된 활자인 을해자(乙亥字)의 자본을 쓸 정도로 신묘하고 독보적인 글씨를 썼으나, 강희안은 스스로 이것을 숨기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이 욕될 뿐이다'라 하여 자신의 글씨와 그림이 전해지는 것을 꺼렸기에 전해지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계유정난 이후 사육신으로 비명횡사하거나 생육신으로 세상 먼곳으로 정처없이 떠난 벗들을 그리는 마음이, 원래도 소박하고 조용한 그를 더욱 자신에게 침잠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지.
*이 작품은 서울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보와 이미지는 네이버 검색을 참고하고 내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