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콘서트

7080 세대들의 MT

by 바다나무

저녁 먹고 늦은 시간 벤치에 앉아 노을 지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해님도 오늘 할 일을 다하고 집으로 돌아는 모양이다. 한잔술에 붉어진 얼굴로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지 발걸음이 더디다. 고단했던 하루인 듯싶다. 어둠이 밀려온다. 간의 흐름 속에서 구름 속의 달님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여기저기 별님도 종종걸음 하고. 하늘에서도 삼박자가 맞물려 쉼 없이 돌아간다. 적당히 빠지고 들어온다. 제자리를 알고 분수를 지킨다. 시골의 하늘은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히 임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퇴색한 하늘빛으로 희뿌연히 얼렁뚱땅 얼버무리는데. 그래서 시골이 좋다. 하늘이 분명해서.


전화가 왔다. 지금 오라고. 귀촌한 남편의 친구다. 도시에서는 남의 집에 전화하거나 방문하기에는 예의가 없는 늦은 시간이다. 시골사람들은 벌써 초저녁잠에 한참 꿈나라에 갔을 시간이. 주말이라 대처에 살고 있는 부인이 온 모양이다. 달 밝은 밤 와인이나 한잔하자고. 이 밤을 즐겨보자고. 문득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났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가야 한다. 시계가 내일을 재촉하는 시간일지라도.


평상시 남편의 친구는 퇴직 후 혼자 전원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거나, 색소폰을 불거나, 라이딩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 천마농사도 조금 짓는다.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고. 늘 웃음기 있는 얼굴에 몸도, 마음도 넉넉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 역시 나와 동갑이라 편하게 지내고 있다. 가끔씩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만나기도 하고, 주말에 오면 식사도 여러 번 같이 해서 친구처럼 지낸다. 아직은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해 주말부부를 하고 있다. 숲 속 외딴곳에 작은 계곡을 낀 전원주택에서 남편은 혼자 신선놀음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땐 또 다른 귀촌부부 한 팀이 와서 있었다. 사업을 하다 경치가 좋아 이곳에 자리 잡은 분이시다. 통성명을 하고 와인잔을 부딪쳤다. 낯선 타인들이지만 자연을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에 금방 공감대를 형성하며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나와 동갑이다. 모두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은퇴자들이기에 시간의 줄다리기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다. 이 깊어가는 것과도 아랑곳없다.


와인잔이 오가는 가운데 일주일 만에 온 여주인이 지금부터 우리들만의 MT를 자고 한다. 동갑내기 여자세명이. 일단은 참외서리부터. 어딘가 참외를 심어놓았는데 일주일 만에 오니 많이 익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교통경찰이 길안내를 하는 긴 형광봉을 들고 조심조심 어둠의 밭을 향해 전진하였다. 앞에는 선봉장인 주인이 을 밝히고. 중간의 행동대장은 참외를 따고. 말미의 보초수는 바구니를 들었다. 어디선가 노란빛이 얼굴을 삐죽이 내밀었다. 제법 튼실한 참외다. 인이 이미 선봉장으로 역모에 가담했으니 그만 따라는 명령이 나올 때까지 우린 계속 직진했다. 어느덧 한 바구니 가득하다. 이 야심한 밤에 밭 한 뙈기를 통째로 털었다.


참외서리를 하고 오니 남편들이 와인에 기분 좋을 만큼의 화사함을 얼굴에 머금고 있다. 하늘엔 달님이 구름 속을 들락거리는 숨바꼭질 하고. 같이 나이 들어가는 초로의 삶을 멋지게 살자고 동맹이라도 맺은 듯 으쌰으쌰 하며 밤을 즐긴다. 달빛에 보이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들이 돌아선 젊음을 말해준다. 있어 보기도 하고. 그 흔한 중후함을 머금고 있으니. 마음이 여유 있어 보여서 좋았다. 이 궁색해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새로운 인생에 희망들을 가지고 있서 보기 좋았다. 고요함이 적막감을 넘어 새로운 환희를 가져다주었다.


와인병의 바닥이 보인다. 계곡옆의 너럭바위로 자리를 옮겼다. 환한 달맞이꽃이 어둠을 밝혀준다. 명상하기 좋은 바위다. 저 멀리 달이 우리만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여기저기 떠있는 별들의 어우러짐도 멋지다. 6명이 널찍한 바위 앉자 누군가가 꽃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달맞이꽃" (가수 이용복)이라는 노래를. 느새 선창에 이어 모두가 입을 모으고 있다. 오늘 처음으로 달과 달맞이꽃을 동시에 보면서 노래를 불러본다. 그 노래 가사가 조용히 가슴에 내려와 앉는다. 옆에 핀 달맞이꽃이 자기 노래라고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고. 얼마나 기다리다 꽃을 피웠을까? 밝은 밤에 홀로 피어. 달맞이꽃과 우리들의 삶이 오버랩된다.


계속 이어지는 7080 세대의 노래에 우리는 깊은 산속에서 달빛 음악회를 열었다. 계곡물이 반주를 맡고 풀벌레가 화음을 넣었다. 전혀 고성방가로 신고가 들어올 리 없는 산골짝이다. 이 아늑하게 막아었다. 계속 노래가 이어진다. 밤배(가수 둘다섯).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수 김광석) 등등. 아련한 추억 속 노래들 우리 모두를 대학생으로 시간의 추를 돌려놓았다. 40년 전의 각자 다른 추억들을 함께 공유하 늦은 MT에 참여하고 있다. 왠지 모르게 노래를 부르며 가슴이 련해졌다. 예까지 살아오는 동안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환한 달빛이 우리들의 시간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동안 수고했다고. 으로의 인생도 즐겁고, 신나고, 멋지게 살라고. 마지막 노래는 의리 있는 남편들 "고맙소"(가수 조항조)라는 노래로 마무리한다. 아내도 목소리를 더한다. 같은 마음으로.


행복은 어둠 속에서도 피어났다. 소소한 나의 일상에서 예측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건져 올려졌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고 답을 해 주었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속에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내가 만들어가는 노년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더불어 익어갈 사람들이 있기에 외롭지 않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이는 달은 아직도 내가 길을 헤맬까 봐 극구 집까지 따라겠다고 한다. 이젠 괜찮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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