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바다나무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은 탓이다. 일주일 만에 왔더니 정원이 가을로 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긴 오는 길의 벼이삭도 다가오는 추석 잔치상에 올라갈 준비를 하느라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었다. 배롱나무 꽃도 붉은빛으로 변해 축제 열기에 더불어 합승하려 하고 있고. 저만큼 과수원의 빨간 사과들도 추석 대목장을 기다리는 농부의 주머니를 먼저 열어놓고 햇살 받아 반짝이는 미소 띤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 시골길의 잠자리와 나비도 자동차 와이퍼 끝에 앉아 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바다나무 정원의 설악초는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로 향하려는지 하얀빛을 눈부시게 발한다. 저 위 덕유산 무주리조트에서 스키라도 타고 내려온 것일까? 밤이면 유독 빛을 발해 정원을 밝혀준다. 푸르름만을 자랑하던 옥잠화도 하얀빛을 더해 정원을 밝게 비추어준다. 이 두 가지 꽃이 길고 지루했던 여름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흔들 그네 옆 호피무늬억새는 하늘에 치닿을 듯 의연함으로 위엄을 뽐내고 있다. 다소 숙연해지기까지 하다. 가을로 가는 길목을 희고 웅장함으로 치장하고 정원의 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성숙함에 이어 비장함까지 내포하고 있는것 같다.
바다나무 농원에도 꽃과 나무만 심었다고는 하나 최소한의 먹거리로 건강에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터라 추수라는 이름으로 내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몇 포기 안심은 가지, 고추, 호박, 오이, 바질들이 자손번성을 왕성하게 하여 바구니를 넘치게 한다. 일단 주인 된 도리로 그 공을 저버리면 안 될 것 같아 어설픈 손으로 어루만지며 열매 맺느라 고생한 노고를 치하해 준다. 모진 풍파 겪어내며 버티어 줌에 감사한 마음으로 겨우내 먹을 비상식량으로 확실한 자리매김 해준다.
가지를 자르고, 호박을 잘라 건조기에 말려 고자리를 만들었다. 바질도 잎으로 보관하기 어려우니 말려서 가루를 내어 샐러드나 빵에 뿌려 먹어야 할 것 같다. 깻잎은 순은 따서 삶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잎은 따서 초간장에 절여 놓았다. 얼마 안 되는 빨간 고추는 믹서기로 갈아서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배추 겉절이시 양념으로 넣어 먹어야 할 것 같다. 이것저것 야채를 정리하다 보니 갑자기 다가온 가을에 손보다 마음이 바빴다. 마치 일 년이 다 지나가버린 것처럼.
오후 내내 부지런을 떨었다. 어느새 내 모습에서 농부의 모습이 보이고 주부의 모습이 보였다. 당연한 걸 하면서도 스스로 기특해했다. 이런 것들이 어쩌면 시골생활의 묘미인지도 모른다. 수확의 기쁨!. 설렁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술렁이며 분주한 시간이 되었다. 오늘이 겨우 가을 초입인데 너무 앞서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맞이할 가을이 반갑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탓이리라. 역시 수확은 마음을 풍성하게 해 준다. 비상음식들 탓에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다.
커피 한잔을 들고 흔들 그네에 앉았다. 하늘빛이 가을바람을 몰고 왔다. 아직은 훈훈함까지 달고 왔다. 그래도 느낌이 어제와는 달리 가을냄새가 난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길을 잘 찾아오고 있었다. 난 지금 인생 2막의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왕좌왕하지는 않는 걸까? 올가을 계획해 놓은 내 삶의 길들을 잘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 어느 한 부분도 낙오됨 없이. 여러 가지 생각들이 설왕설래한다. 그래, 버킷리스트는 하나하나 지워가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해보고 안되면 미련 없이 돌아서는 거야.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몇 가지 신청해 놓은 가을학기 강좌 중 다소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무엇보다 초보걸음으로 나선 그림공부를 잘할 수 있을는지.
퇴직 후 이것저것 배우면서 지금까지는 결과를 자격증 취득으로 마무리했다. 특별히 자격증이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계발 내지는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배움이 좋았다. 그 과정들이 재미있었다. 어쩌면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것들을 평생 취미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지속력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돌아보니 책 읽기는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직장 다닐 때는 최소한 한 달에 두 권 정도의 책은 사서 읽었는데 요즘은 브런치 작가님 글을 읽는 것으로 책 읽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슴이 허허롭고 갈증을 느낄 때면 화원에서 식물을 샀고, 머리에 허기를 느낄 때면 책을 샀다. 한 달 동안 수고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일정액의 책값을 월급에서 따로 떼어놓았었다. 적어도 한 권은 자기 계발서, 또 한 권은 베스트셀러로. 어쩌면 지식의 축적이라는 이름에 앞서 변화하는 시대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보니 내가 구입한 책중에는 브런치 작가님들의 책도 꽤 있었다. 퇴직을 하니 어떤 자극제가 없어진 탓인지, 게으른 탓인지,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책꽂이의 책들을 다시 한번 읽고 좋은 글귀들을 필사하려고 했던 계획들이 어쩌다 보니 지켜지지 않았다.
이제 가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다가온 가을을 활짝 마음문 열어주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갖은 야채를 용도에 맞게 비상식량으로 보관하듯이 내 마음속에도 언제든 비상시 꺼낼 수 있는 여유의 지혜를 책을 통해 담아 두어야 할 것 같다. 가을이 내민 손을 반가움을 얹어 덥석 잡아본다. 어서 와. 가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