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여정

아침산책길에서의 단상

by 바다나무

얼마 전에 잠깐 어지럼증이 있었다. 병원에 갔더니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피곤하지 않은지를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었고, 다소 피곤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자 장거리 운전도 했고 모임도 많았었으니까.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의 결과일 터이다. 퇴직 후 쉼을 쉼처럼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인지도 모른다. 너무 열심히 놀았나 보다. 삶의 여정을 조금 늦추기로 했다. 그렇게 쉬어가기엔 도시보다 시골이 안성맞춤이다.


문을 열고 나가니 밖의 공기가 다르다. 다소 차가운 아침공기가 긴팔을 찾게 한다. 요즘 날씨가 15도 이상의 일교차를 보여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별일 아닌 것으로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조금이라도 이상기운이 느껴지면 몸을 도사리게 된다. 직장 생활하면서 환절기마다 찾아오는 연중행사 같은 감기를 이제는 떨구어내고 싶었다. 큰 일교차에 몸을 단속하기에 이른다. 얇은 겉옷을 하나 챙겼다.


밭에서 채취해 온 야채들로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해 아침 산책길에 올랐다. 아침을 계곡에서 해결하고 올 예정이다. 세컨드하우스가 있는 집 앞 산책로를 따라 임도길을 걷는 것도 꽃을 가꾸는 것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호사다. 조금 걷다 보니 저수지가 보인다. 아침윤슬에 잔잔 물결이 고요하기 그지없다. 나무그림자가 물에 비추어 한 폭의 그림 같다. 모든 시름을 이곳에 던져두고 간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그 많던 새털구름도, 뭉게구름도 자취를 감춘 그야말로 전형적인 파란 가을하늘이다. 산책로 올라가는 길에 누군가 심어 놓은 무궁화 꽃이 한창이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린다. 문득 애국가 3절이 떠올라 흥얼거려 본다. "가을하늘 공활 한데 높고 구름 없이~~~". 이쯤이면 국기 게양식이라도 해야 하나?


조금 올라가니 여름 내내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았던 계곡이 이제야 쉼을 맞은 듯 혼자 여유 있게 흘러간다. 우리도 잠시 누군가 만들어놓은 편편한 돌의자에 앉아 가지고 온 샌드위치와 커피 한잔을 즐겨본다. 커다란 돌틈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렁차다. 튕겨져 나오는 포말에 금세 더위가 가신다. 계곡이 굽이지는 곳에는 장박 하시는 자연인이 계시는지 조그만 텐트가 하나 보인다. 세월을 낚고 계시는 듯하다. 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곳은 계곡이 깊어서 물이 시원하다 못해 발이 시리다. 나는 이곳을 나만의 얼음골이라 부른다. 발을 담글 용기가 나지 않아 손만 담가 본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시원한 전율이 흐른다.


한참을 계곡물과 여유를 부리고 다시 임도길을 따라 걸었다. 이름도 알지 못할 많은 야생화가 깊은 산속에 군락을 이루어 서로 엉퀴어 상생하고 있다. 사위질빵. 으아리, 여뀌, 무릇, 오이풀 등 처음 들어본 이름들이 여기저기 무성하다. 아마 산길을 걸으면서 많이 본 꽃이었는데 이름을 알지 못했으리라. 다행히 짝꿍이 숲해설가 면모를 드러내며 알려준다. 어디선가 분홍색 여뀌를 모아 강아지풀로 질끈 묶어 작은 꽃다발도 하나 선물해 준다. 프러포즈할 때도 안 해주던 꽃다발을 반평생 살고 나서 아침 산책길에 손에 쥐어준다. 나이 든 노년의 아부(?)를 감사히 받고 움푹 파인 나무기둥 새집 앞에 정표로 남겨둔다. 딱따구리가 쪼아 만든 새들의 보금자리에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으름도, 밤송이도, 대추도 하늘빛을 받아 영글어 간다. 그 사이 비추는 햇살에 잎사귀가 반짝반짝 윤기를 발한다. 마치 참기름이라도 발라놓은 듯이 맨질 거린다. 잠시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S자 의자에 누워 하늘을 본다. 눈이 부셔 조용히 눈을 감고 햇빛을 받아본다. 온몸에 따스한 가을 햇살과 바람이 머문다. 스치는 나무향기, 풀향기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괜스레 이럴 땐 내 마음도 맑게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산책을 하면서 하나씩 비워가며 욕심도 내려놓는다. 자연 앞에서 미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 애써본다. 아무 대가 없이 베풀어 주는 자연에게 고마워하며 후대에게 물려줄 자산이기에 조심스레 주변도 살펴본다. 알고 있는 인지적 사실에 내 몸으로 응답하며 보답하려 써본다. 주변을 살펴본다. 다행히 깨끗하 내가 달리 주울 쓰레기는 없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산길을 돌아 다시 마을로 들가는 길이다. 사과농가가 많아 온 동네가 빨간빛으로 물들어 있다. 올해는 사과값이 무척 비싸다고 한다. 추석대목을 보려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아무쪼록 일 년 공들여 지은 농부의 고된 땀방울을 씻어 주었으면 좋겠다. 터덜터덜 걷는 신작로길에 경운기를 타고 지나가시는 어르신이 산책 갔다 오냐며 말을 건네신다. 당신은 부모님 산소에 벌초 갔다 온다고 하시면서. 두들 바싹 다가온 가을을 맞이하기에 바쁘다. 나도 이젠 가는 여름을 아쉬워 말고 다가오는 가을을 품어 안으리라. 내 인생의 가을도.


특별할 것 없는 아침 산책길에서 자연을 즐기며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자연과의 교감에서 위로받고 갑자기 풍요로워지는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다. 도시의 아침 산책길과는 다른 느낌으로 뭔가 분주함 없 평온했다. 이젠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 점차 쉼에도 익숙해지리라. 다소 느린 여정일지라도 함께 손잡고 갈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느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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