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하얗고도 여린 자연(紫煙)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香)이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이병기 : 시조 <난초(蘭草)>
오키드(Orchid). 동양에서 난초라 불리는 이 식물은 예로부터 고귀함과 품격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특히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로, 군자의 덕목을 상징하며 선비와 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길고 곧게 뻗은 잎새, 매끄럽고 섬세한 꽃잎, 우아한 향기, 그리고 기르기 어려운 특성까지. 동양 문화에서 난초는 품격과 도도함의 아이콘이었다. 우리 모 교수님께서도 귀한 품종의 난초를 키우며 자신의 품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품위 넘치는 오키드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땅밑의 뿌리는 남성의 고환의 모습이란 사실이다. 땅 위의 잎과 꽃은 고고한 귀족의 여성의 모습인데, 땅밑의 뿌리는 고환의 모양이라니, 배반감마저 든다. 난초를 뜻하는 "오키드(orchid)"라는 이름이 고대 그리스어 ‘오르키스(ὄρχις)’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고환"을 뜻한다. 꽃의 뿌리가 고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그리스인들이 '저 난초의 향기는 정말 품격 있구나'라고 말할 때, 실제 이렇게 들리는 셈이다.
"저 X랄의 향기는 정말 품격 있구나"
앞서 시조의 향기가, 아는 이는 안다는 향기가 확 달라지지 않는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향기가 되어버렸다.
실제 난초의 뿌리는 그것들과 전혀 비슷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단지, 특정한 난초 속(屬)의 식물들, 특히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자생하는 몇몇 난초들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Orchis mascula(Early Purple Orchid)와 같은 고대 유럽 난초들은 뿌리가 두 개의 타원형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고환을 닮은 모습이었다(The root system consists of two tubers, rounded or ellipsoid). 물론 고대의 난초와 현대의 난초, 서양의 난초와 동양의 난초가 생긴 것이 다르기는 하다만, 품격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난초의 비밀은, 사군자, 특히 난초를 사랑하는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이유로 난초가 생식력과 번식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특히, 난초 뿌리의 크기와 모양이 아이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난초 뿌리를 섭취하면 아들을 낳을 확률이 높아지고, 작은 뿌리를 섭취하면 딸을 낳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믿음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고대 의학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형상유사"(유비추론 또는 Similis Similibus) 개념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외형적 유사성이 그 식물의 효능과 연결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남녀사이의 사랑을 유발하는 약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니 꽤나 음탕한 느낌의 약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난초와 고환의 연관성은 많은 의학 용어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Orchiectomy: "고환 절제술"이라는 뜻으로, 고환을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수술을 의미한다. 여기서 "orchi"는 난초의 어원과 동일하다.
Cryptorchidism: 크립토(crypto) 머니가 떠오르지 않는가? 암호화된, 즉 숨겨진 이라는 뜻이고, 오키(orchi)는 고환, 이즘(ism)은 병적 상태이니, 안 보이는 고환이란 뜻이다. 고환이 제 위치로 내려오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Orchitis: 염증을 뜻하는 접미사 "-itis"와 결합해 만들어져, 고환염을 의미한다.
그럼, Orchidology는 무슨 뜻일까? 고환학? 아니 난초 원예학이다. 난초 재배를 연구하는 학문이란 말이다.
난초는 이처럼 도도하고 우아한 겉모습 속에 다소 놀라운 어원을 품고 있다. 동양에서는 고결함의 상징으로, 서양에서는 남성성과 생식력을 상징으로.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난초는 같은 모습으로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도도한 품격 속에 음탕한 뿌리를 품은 오키드는, 어쩌면 우리 삶의 양면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식물이 아닐까. 품격 있는 저속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