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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Dec 22. 2023

사람들은 단 한 번 자유를 잃는다 - <반바지 당나귀>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27번.





   몽환적인 작품입니다. 물 한방울 나오지 않던 오지의 땅이 나무와 꽃, 과일들이 풍성한 과수원으로 변하고,  동물들은 주인의 주술로 인해 규칙을 따르고, 당나귀는 사람의 말을 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건설하려는 한 노인과, 그에게 선택된 소년의 이야기가 신비스럽게 펼쳐지는데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마저도 희뿌연 안개처럼 환상적인 영상으로 그려지는 소설입니다.



 << 콩스탕탱 글로리오의  시선 >> -  주인공 소년입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가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던 중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에 이끌려 산 위 불모의 땅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노인과 동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많은 것을 용서하기도 한 당나귀,   다른 당나귀들에겐 얌전하고 사람들을 대할 땐 비굴하지 않게 공손한 당나귀  (···) 그에게 표명된 이 각별함은 섣날 첫추위가 닥치자마자 사라질 위협을 받곤 했다.  왜냐하면 나무랄 데 없는 이 완벽한 당나귀는 그때부턴 바지를 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바지는 실상 그의 두 앞다리나 고작 감싸 줄 뿐이었다.  골 무늬가 있고 윤이 나는 갈색 우단 천으로 된 멋진 바지였는데 윤을 잘 낸 가죽 멜빵으로 가슴팍과 목에 매어져 있었다.








  *  나뭇가지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반바지 당나귀'를 알아보았다.  (···) 그는 한 전형으로서의 당나귀,  순수한 당나귀, 당나귀의 이상(理想) 그 자체였다.


  *  그 사려 깊은 눈길을 잊지 못할 것이다.  (···)  굴종적인 짐승의 시선이 아니라 자유로운 짐승,  인간의 동반자로 선택된 짐승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청록색 눈망울 뒤로는 또 다른 어떤 힘들이 어려 있었다.


  *  그는 내게 말했다.  "내 등에 오르렴. (···) 종종 너를  봤어. 가이욜 건너편, 다리 근처에 멈춰 서 있는 널 말이야. 몇 시간이고 이 떡갈나무 숲을 넘어다보는 그 모습에서 난 네가 언젠가는 개울 이쪽으로 건너오고 말리란 걸 짐작했지. 넌 이제 여기 왔어."










*  마지막 인가에서도 10리 밖에 웅크리고 있는 이 집, 들에서 바라본다면 거의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을 이 집은 나에겐 단순한 사람의 집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이 보였다. (···) 집 안 벽감의 가리개가 떨어져 버렸다. 커다란 검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그 구멍 속에서 눈알 두 개가 번쩍였다.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꺼지듯 다시 사라졌다.  노인도 사라지고 없었다.


  *  떡갈나무들이 관을 씌우듯 완전히 삥 어둡게 둘러싸고 있는,  그러나 그 안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어떤 계곡을 보았다.  아직도 나지막하니 걸려 있는 달은 그 계곡의 한 부분밖에는 비추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의 내 정면에,  바위 위에 한 사람이 있었다. (···) 그는 피리를 불었다. 그는 부드러이, 노한 듯이, 그러나 애소 어린 고통을 반복 표현하며 강박적으로 똑같은 가락을 연주했는데,  그보다 아래에서, 내가 몸을 숨긴 거의 곧바로 아래로,  계속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자국들이 내는 둔중한 소리와,  컴컴한 덩이 몸체를 이룬 채 내는 거친 헐떡임이 그 가락에 대답하고 있었다.   (···) 거기에는 짐승들이 있었다.









 *  나는 집에 집착했다.  왜냐면 집에는 누군가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애가 없는 집은 더이상 집이 아니었다.


  *  채소밭의 친숙한 작은 식물들이 더미더미 조약돌 근처로 노랗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포도덩굴이라곤 동굴 아래로 이제 타 버린 그루터기 하나뿐이었다. 아몬드나무들은 죽어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경이로운 그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던,  암벽 병풍이 둘러선 그 우묵 자리를 화재가 휩쓸고 간 냄새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나는 '현존'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가시적인 존재와 비가시적인 존재를 은밀히 증언해 주었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신호, 그러나 내 눈앞에 무언가 특별히 나타나는 법도 없이 때로 돌연 강렬해지는 어떤 신호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 시프리엥의 시선 >> - 수수께끼같은 노인입니다. 척박한 땅을 꽃동산으로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천국'으로 만들어냅니다. 필요한 물품을 위해 반바지를 입힌 당나귀를 마을에 내려보낼 뿐, 인간 대신 식물과 소통하고. 동물들을 주술로 복종시킵니다. 소년 콩스탕탱을 사랑하지만 그가 떠나자, '천국'에 불을 지르고 사라져버립니다.


  *   통찰력 있는 신부로서 그분께서는 시프리앵 씨의 정신에 깃든 무서운 악마의 사주를 간파하셨다.  (···)  이 '천국'으로 말하자면 신부님은 하늘에 두셨다.   (···) 우리는 모두 지상 낙원을 원하며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기 마련이다.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  나는 당나귀와 우정을 나눈다.  기이한 일은,  감응을 요구하는 '힘'은 그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단지 그를 깨울 뿐이다. 나귀는 부름을 듣고 대답을 했지만 조심성 있게 그랬다. 나는 그가 내 시중을 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협력하기를 원하고 또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우정'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래서다.


  *  나는 행복하다.








 *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살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경탄하지들 않는 것 같아요. "  그분이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정말이지 이상한 일은, 죽는다는 일에는 다들 놀라워하지.  (···) 행복하게나,  그리고 행복한 것으로 만족하고······.


  *  짐승들은 우리를 닮았다. 그들의 지혜,  불신, 잔인함.  왜냐하면 그들은 흔히 잔혹하며 또한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랑할지어다.


  *  짐승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 예전에는 그들이 행복하다고 믿었기에 나는 그들 곁으로 다가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 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쩌랴.  그들을 사랑할 뿐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 억지로 이끌린 것에 불과하다. 불신하면서도 말하자면 주술의 힘에 굴복한 것이다.


  *  나는 동산을 창조하리라.  (···) 나는 그 동산을 통해 '대지'의 정령을 은밀히 들춰 보리라.








 *  짐승과 식물들이 내게 복종한다.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여우는 왜 이끌려 들지 않는 걸까?   


  *   '천국'은 땅 아래 있으니,  '아담의 저 오래된 동산'은 범죄 후에 고스란히 그대로 파묻혀 버리지 않았던가.  (···)  아! 다리에 서 있는 그 아이가 왔으면!  나는 그를 원한다!  나는 그에게 이 '동산'을 열어 보여 주고 동물들과의 우의를 전해 주리라.  


  *  인간의 아름다움 없이는 지상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법. 식물들이 자라나고 동물들이 모여드는 것도 우선 그 사람 안 열망의 차원일진대.  어쩌면 내 열망이 약해진 것일까?  어떤 젊은 힘이 날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 나는 슬프다. 내겐 그 아이가 필요하다.









 *  나는 저 아이를 사랑한다.  (···)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한 인생에만 상관있는 것이라면 엄청난 힘도 결국 무슨 소용이랴.  (···) 난 그 아이가 필요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모두 넘겨주리라, 결정을 내렸다. 그는 올 것이다.


  *  내가 '주문'을 걸어 그를 꾀어 들였던 것이라면 그는 품위를 잃었을 것이다.  그 주문이 그를 지배할 것일 터이니까.  그러면 그는 후일 그것의 주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단 한 번 자유를 잃는다. 그러나 한 번은 영원을 말한다.)


  *  그는 스스로 왔다. (···) 그는 다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신선하고도 생기 있는,  제 나뭇가지들을 온통 흔들고 있는 '동산'을 자기 속에 지닌 채 떠나갔다.  










 <<  쉬샹브르 신부의 시선 >> - 시프리앵이 오지에 일구어낸 아름다운 낙원을 보고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을 흉내낸 것에 불과함을 꿰뚫어보게 됩니다.


  *  당나귀였어요.  야생화들을 두 바구니 가득 싣고, 그 위로는 아직은 약하지만 막 피기 시작한 작은 꽃들과 여린 싹들로 벌써 뒤덮인 아몬드 나무 가지를 하나 등에 진 당나귀였어요.   (···) 그 가지를 성모님 제단에 바쳤고 며칠 후 벨뛸로 올라갔어요.  예고된 그 기적이,  거기,  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커다란 과수원이 조성되어 나무들마다 온갖 봄꽃이 피어 있었어요.  


  *   그 노인이 나지막이 말하더군요. '짐승들이 가까이 오고 있어요.  그들은 길이 들었답니다.' 속내 얘기하는 듯한 어투가 왠지 모르지만 제게 와락 걱정을 안겨 주었어요.  (···) 다가오지 않으려는 놈이 하나 있어요. 끔찍한 놈 같습니다······ 하지만 그놈도 언젠가 여기 오고야 말 겁니다. (···)  모든 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원은 수확 전에 말라 버릴 거고 생명력을 잃겠지요.'  나는 그곳을 떠났고 그 후론 벨뛸에 다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페이지생략><주인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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