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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y 09. 2024

당신 때문에 나 자신이 되지 못했소 - <검은 책2>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98번.







    자아 정체성이라는 작가의 주제 의식을 실험적 형식으로 풀어낸 문제작입니다.  주인공 갈립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자아 완성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완성해 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자신의 모든 정신 상태가 담긴 "내 영혼의 혼합체"라고 밝힙니다. 



 << 작가의 시선 - 갈립 중심으로 >> -  자신이 숭배하고 선망했던 갈럼니스트 제랄을 대신하여 그의 칼럼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칼럼을 통해 제랄과 뤼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  방은 이십오 년 전,  제랄이 젊은 기자였을 당시 혼자서 살았던 때와 똑같았다. 모든 물건들, 커튼과 전등의 위치, 색깔,  그림자, 냄새가 이십오 년 전과 똑같았다.  (···)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제랄은 최근 칼럼에 이렇게 썼다. 










*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지. 책을 설명하는 살인과, 살인을 설명하는 책은 보편적인 호소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때만 희생자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살인자로 간주되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창조성은 대부분 분노 속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분노 속에 존재해.  하지만 분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매개로만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만들어."  갈립이 장식장에서 꺼낸 옛날 칼럼들을 읽고 있을 때,  (···)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  그는 제랄의 침대로 들어갔지만 곧바로 잠이 들지는 않았다.   (···) 갈립은 머릿속에 있던 제랄의 이미지가 이상한 형태로,  '기묘하게도 결여된'  이미지로 변했음을 깨달으면서,  이 방과 주위의 물건들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갈립이 예상한 대로,  제랄은 신실한 독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세속 공화주의자 독자들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았다.  신문사 사장은 이 주제에서 손을 떼라고 했지만 한 달 후 그는 다시 이 이야기를 다루었다.  










 *  혼자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오로지 다른 사람으로 가장했을 때만 평온을 찾는 사람들처럼  (···)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을 속박하는 몸과 영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속임수였다.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를 얻는 방법이었다. 


  *  "나는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 이 문장은 계속 갈립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랄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나흘간의 노력이,  자신이 제랄과 뤼야의 흔적을 뒤쫓기 위해 했던 추적이 아니라, 제랄이 자신을 위해 꾸민 게임으로 보였다. 


  *  책상에 앉아 복도의 장식장에서 꺼낸 제랄의 칼럼과 메모를 읽으며 제랄과 뤼야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추측해 보는 것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데 위안을 느꼈다. 





 




  *  갈립은 제랄이 이스탄불 어딘가 있는 비밀 아파트에서 몇 주 동안 은둔한 채 이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 칼럼과 초록색 볼펜으로 표시된 지도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한순간,  세상에 신호나 실마리,  두 번째나 세 번째 의미,  신비, 비밀의 장소는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모두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가 본 신호는 자신이 간절히 찾길 원했기 때문에 의미로 읽힌 것뿐이었다. 


  *  "내 얼굴에 있는 의미를 제랄은 벌써 읽었을 거야!"   (···)  그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나는 이제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어."  갈립은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제랄의 삶 전체는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대비해 온 완벽하게 준비된 함정이었다.  갈립은  (···) 제랄의 낡은 레밍턴 타자기를 깨끗이 정돈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서랍 속에 제랄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종이가 들어 있어서,  그는 한 장을 타자기에 끼우고 즉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칼럼은  "드디어 오랜 세월 동안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다."  로 시작했다.  (···) 세 편의 글에 제랄의 서명을 했다.  










*  "당신의 글을 읽으며 보낸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당신만을 생각했소. 제발 내게 당신 주소를 알려 주시오.  (···) 가련한 팬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들의 손에 쥐어 준 핵심 문장도 알고 있소."  (···) 갈립은 한참 후에 조용히 전화를 끊고 코드를 뺀 후,  제랄의 공책,  오래된 의상,  서랍,  글 사이에서,  기억을 찾는 몽유병 환자처럼 조사를 한 후 제랄의 파자마를 입고 그의 침대에 누웠다.   (···) 그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 사이의 비통한 간극을 잊었다. 


  *  목소리가 소리를 질렀다.  (···) "당신은 글을 쓰면서 항상 나 같은 사람을 사냥하려 했어.  그들에게 답장을 쓰고,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지.  (···) 나는 나 자신을 당신처럼 영리하게 느끼면서 승리감에 차 당신의 칼럼을 읽곤 했소.  사람들이 당신에게뿐 아니라 내게도 박수를 보낸다고 확신했소.  (···) 당신을 죽이겠소.  당신 때문에 한 번도 나 자신이 되지 못했소.  (···) 당신은 죽어야 하오. 당신이 칼럼에서 썼던 것처럼,  당신은 사람들을 믿게 만들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믿지 않소.  자신이 믿지 않기 때문에 믿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 거요."


  *  갈립은 마치 어떤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속삭였다.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아니야.  우리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이 될 수 없어.  너는 모든 사람이 너를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의심한 적이 전혀 없어?  너는 네가 네 자신이라는 것을 정말 확신하고 있어?"










*  그는 지친 듯,  생각에 잠긴 듯 보였지만 동시에 평화로운 듯 보였고,  "나는 기억에 잠겨 쉬고 있어." 라고 말하는 듯했다.  (···) "제랄 살리크 살해되다.'  이 헤드라인이 머리기사에 실려 있었다.  신문으로 덮기 전에 찍은 시신 사진도 실려 있었다.  전면을 사건에 할애하고 있었으며,  수상, 공무원, 유명 인사의 발언을 싣고 있었다.  검은 테두리 안에는 갈립이 쓴 칼럼이 제랄의 마지막 칼럼으로,  '집으로 돌아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 알라딘은 아침에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인형들 사이에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뤼야를 발견했다. 


  *  어떤 책에는 우리 마음속 깊이 와 닿아 영원히 새겨지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의 흐름 때문에 너무나 우리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경우 말이다.  (···) 내 이야기의 이 페이지들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기억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쇄공에게 이 페이지를 검은 잉크로 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일 것이다.  (···) 이어지는 페이지들은, 검은 페이지들은 몽유병 환자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장례식에서 제랄의 신문사 편집장 옆에 서게 되자, 갈립은 아직 게재되지 않은 제랄의 글이 상자 가득 있으며, 제랄이 최근 몇 주 동안은 새로운 글을 몇 편밖에 보내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글을 썼고,  과거에 쓰다 만 초안도 모두 마무리했으며,  전에 한 번도 다투지 않았던 주제를 그의 특징인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살려 완성했다고 이야기했다.  편집장은 당연히 그 글들을 제랄의 지면에 싣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제랄의 지면에,  제랄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게재될,  칼럼 작가로서의 갈립의 삶이 시작되었다. 


  *  그날 밤, 갈립은 알라딘의 가게의 인형 사이에 있는 뤼야를 꿈에서 보았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른 인형들처럼, 눈을 깜빡이며 가냘프게 숨을 내쉬고만 있었다.  그녀는 갈립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갈립은 늦었다.  도무지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단지 멀리서,  쉐흐리칼프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알라딘의 가게에서 인도로 흘러나오는 진열장의 불빛만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  제랄은 오래전에,   (···) 끔찍한 기억력 감퇴병에 걸렸다.  자신의 병을 세상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해 이 아파트로 숨어들었고,  뤼야와 갈립에게 계속 도움을 구했다.  그래서 어떤 밤에는 갈립이,  어떤 밤에는 뤼야가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그가 과거를 되찾고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랄의 이야기를 들었고,  받아 적기도 했다.  밖에 눈이 내리면 제랄은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  뤼야에게서 내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 글이다.  이 검고, 새까만 어두운 페이지들,   (···)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연인의 이야기와,  얼굴에 있는 사라진 의미 그리고 비밀을 찾는 남자 이야기를 떠오르게 할 것이다. 


  *  갈립은 마감 시간에 맞춰야 할,  실은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제랄의 마지막 글을 쓰고 있다. (···)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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