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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버렸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429번.

by 이태연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수상작입니다. 한 인간에게 두 종류의 사고 시스템을 내장한다는 내용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인간에게서 그림자가 분리되면 마음도 없어진다는 내용의 '세계의 끝'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상력에 푹 빠져 읽어가다 보면 두 이야기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음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기사입니다. "환상적이고 미스터리하며 재밌다. 마치 프란츠 카프가가 만들어 낸 환상 세계 같다."



<<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의 시선 >> - 35세 남자로 잠재의식을 암호화 키로 사용하여 데이터를 처리하도록 훈련된 독신의 계산사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괴짜 과학자의 부름을 받아, 도쿄 한가운데 지하 비밀 연구소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느 동물의 두개골을 가져오게 됩니다.


* 문이 닫히자 나는 완벽한 어둠에 갇혔다. 바늘 끝만 한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완벽한 어둠이었다. (···) 나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이 그 자리에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마치 비닐 랩에 둘둘 싸여 냉장고 안에 던져진 다음 그대로 문이 닫혀서 갇혀 버린 생선 같은 서늘한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20231216_182331.jpg 어둠에 갇혔다




* 동물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쾡하게 뚫린 두 구멍으로 정면 벽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연구용 표본이기는 해도, 그런 뼈들에 포위되어 있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 나는 죽음 자체는 그렇게 두렵지 않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올해 죽으면 내년에는 죽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실로 간단한 일이다.


* 나는 그저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계산사이다. 딱히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욕심도 없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애인도 없다. 가능하면 돈을 많이 모아, 퇴직 후에는 첼로나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한가롭게 노후를 보내고 싶어 할 뿐인 남자다.





20231216_181509.jpg 세계의 끝





* 나의 셔플링 비밀번호는 '세계의 끝'이다. (···) 계산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훈련을 받고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자 그들은 나를 2주간 냉동했다. 그동안 나의 뇌파를 샅샅이 조사하고 거기에서 나의 의식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추출한 다음 그걸 나의 셔플링을 위한 패스·드라마로 정하고, 그걸 다시 나의 뇌 속에 입력한 것이다. (···) 즉 카오스 같은 의식이 전체로서 존재하고, 그 안에 마치 매실 씨처럼 그 카오스를 요약한 의식의 핵이 존재하는 것이다.


* 셔플링 작업은 나의 자부심이나 능력과는 무관하다. 나는 이용될 뿐이다.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나의 의식을 사용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처리하는 셈이다.


* 햐얗게 닦인 두개골은, 거기에 새겨진 오래된 꿈을 (···)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걸 이야기로 읽어 낼 수는 없었다.


* 사람이 뭔가를 달성하려 할 때는 아주 자연스럽게 세 가지 포인트를 파악한다. 현재 어느 선까지 이루었나?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나? 앞으로 어느 정도 하면 달성할 수 있나? 하는 포인트다. 이 세가지 포인트를 빼앗기면 뒤에는 공포와 자기 불신과 피로만 남는다.





20231216_181101.jpg 그림자를 버렸다





<< '세계의 끝'의 나의 시선 >> - 사방이 꽉 막힌 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마을에 도착한 나는 입구에서 문지기에 의해 자신의 그림자를 잘라내게 됩니다. 그러나 잘려나간 그림자는 나에게 은밀한 탈출을 제안합니다.


* "그림자를 버리든, 안에 들어가는 걸 포기하든, 둘 중 하나야." 나는 그림자를 버렸다. 문지기는 나를 문 옆에 있는 공터에 세웠다. 오후 3시의 태양이 내 그림자를 또렷이 지면에 그리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리고 문지기는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예리한 칼날을 그림자와 지면 사이에 밀어 넣고, 좌우로 몇 번 흔들어 자리를 잡고서 그림자를 지면에서 깔끔하게 떼어 내었다. (···) 몸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하고 지친 듯 보였다.


* 나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벽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날리는 어둡고 정체된 하늘 아래에서, 벽의 완벽한 모습이 한층 두드러졌다. 내가 벽을 올려다보자, (···)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하고 그들이 말을 거는 듯했다. 너는 뭘 찾고 있는 거지, 하고.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20231216_180507.jpg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문지기의 말 >> - 세계의 끝에 있는 고립된 마을의 문지기입니다. '꿈 읽기' 표식을 위해 주인공의 안구를 칼로 찔러, 햇빛을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나'로부터 그림자를 떼어내 버립니다.


* 당신 일은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거야. (···) 자네는 앞으로 '꿈 읽기'라고 불릴 거야. 자네에게 이름은 없어. '꿈 읽기'가 이름이지. 내가 '문지기'인 것처럼 말이야. (···) 그 눈으로는 햇빛을 볼 수 없어. 그 눈으로 햇빛을 보면, 나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 그림자 따위는 있어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돼. 무겁기만 했지.


* 벽돌은 완벽하게 들러붙어 있어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 들어갈 틈이 없어. (···) 아무도 벽에 상처를 낼 수 없어. 올라갈 수도 없고. 왜냐, 이 벽은 완전하기 때문이야. 잘 기억해 두라고. 아무도 여기서 나갈 수 없어.


* 모두 사라져. 순간적인 기분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그림자는 이제 잊어. 여기는 세계의 끝이야. 여기서 세계는 끝나고, 더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아.





20231216_181246.jpg 그림자는 이제 잊어





<< 그림자의 말 >> - 문지기가 강제로 떼어낸 주인공 '나'의 그림자입니다.


* 사람과 그림자가 떨어지다니, 뭔가 좀 이상하잖아. 이건 잘못된 일이야. 여기도 잘못된 장소인 것 같아. 사람은 그림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그림자는 사람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갈라진 채 존재하고 살아 있어. 뭔가 잘못된 거라고. (···) 너는 나를 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 우리, 지금까지 둘이서 함께 잘 지내 왔잖아. 그런데 왜 나를 버린 거야? (···) 기회를 봐서 도망치자. 둘이 같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자.


* 우선 이 마을의 지도를 만들어. 남에게 물어서 만들면 안 돼. 네가 네 발과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리는 거야. 눈에 보인 건 하나도 남김 없이 거기에 그려 넣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20231216_182149.jpg 여기는 세계의 끝이야





<< 노인의 말 >> - 세계의 끝, 높은 벽에 에워싸인 고립된 마을에 살며 체스 두기를 즐깁니다.


* 그림자와 헤어지고, 그림자를 죽게 하는 건 괴로운 일이지.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에 떨어져 오랜 친분이 없는 상태에서 그림자가 죽었다면 몰라도, 나이를 먹어서 헤어지면 괴로움이 한층 더 하지.


* 타인에게 배운 것은 그저 배움을 끝나지만, 스스로 익힌 것은 자네 몸에 남아.


* 친절함과 마음은 전혀 다른 것이야. 친절함이란 독립된 기능이야. (···) 마음이란 것은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강한 것이지. 그리고 훨씬 더 모순된 것이고.


*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상실감도 없고, 실망도 없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도 없어지고, 생활만 남아. 조용하고 소박한 생활만 남지.












<페이지생략><주인장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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