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71번.
쌍둥이처럼 닮은 동양인과 서양인이 서로의 삶을 바꾸어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반된 문화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닮은 꼴'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느 한쪽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부정하고, 둘의 합일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 작품에 대해 "동양과 서양이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먼가는 내 소설의 소재가 아닙니다. (···) 이 소설은 동양은 동양이 되지 말며, 서양은 서양이 되지 말라는 바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고 언급해줍니다.
<< '나'의 시선 >> - 베네치아의 학자입니다. 항해 중 포로로 잡혀 호자라는 터키 주인의 노예가 됩니다. 과학과 학문에 대한 관심 등 모든 면에서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람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해가며 동지애를 키워갑니다. 그러던 중 '나'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이에 터키인 호자는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인 노예인 '나'는 호자의 신분으로 터키에 정착하게 됩니다.
*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 그 당시 나는 어머니와 약혼녀 그리고 친구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다른 사람이었다. 한때는 나였던, 또는 지금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을 때로 꿈속에서 보고 땀에 젖은 채 깨어난다. (···) 그 사람은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천체학, 수학, 물리학 그리고 그림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자만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 내게서 모든 것을 배운 후에야 풀어 줄 수 있다고 했다. (···) 나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그 하루의 두려움이 가득 찬 눈으로, 신경이 거슬리는 우리 둘의 유사점을 불가피하게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호자는 이제 '가르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연구해야 하며, 함께 찾아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했다.
* 이제는 내가 무슬림이 되건 말건 별 차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에게 내가 꾼 꿈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나 대신 우리 나라에 가서 내 약혼녀와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식에서 아무도 그가 내가 아닌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터키 전통 의상을 입고 구경을 하다가 어머니와 행복한 약혼녀와 만났다. 어머니와 약혼녀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등을 돌린 채 사라져 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 나는 두 달만에 지난 십일 년 동안 알지 못했던 그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 흑사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 온종일 사람들을 만졌다고 하면서 밤마다 내게 그 손을 내밀었다. 나는 꼼짝 않고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나 몸 위를 기어 다니는 전갈을 보고 질겁하는 바로 그 느낌! (···) 나는 때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그는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쥐고 나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거울을 보자." (···) 나는 내가 되어야 할 사람을 보았다. 지금은 그도 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둘은 같은 사람이었다!
* 사람들의 열광과 아우성 속에서 나는 갑자기 바보 같은 희열에 빠졌다. 호자가 그 순간 나를 보지 못했다고 믿고는, 온 힘으로 소리치며 그를 불렀다. 나의 존재를 알아주기를 원했다. (···) 하지만 승리로 인해 덕을 본다거나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원해서는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는 아주 다른 감정이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호자 그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주 꾸던 악몽처럼,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어 밖에서 보고 있었다.
* 십오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이고, 약혼녀도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을 거라고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날이 갈수록 그들이 꿈에 나타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꿈속에서 그들이 베네치아가 아니라, 이스탄불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다. 베네치아로 돌아간다고 해도 도중에 그만두고 온 삶을 그다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 나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환상들을 들려주었다.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기 때문에 나도 지금은 대부분을 믿고 있는 이 환상들이, 내가 어렸을 때 정말 경험한 것인지 책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을 때마다 연필 끝으로 다가온 꿈같은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 모든 인생은 서로 닮았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왠지 그 말이 두려웠다.
* 인생과 세상 그리고 자신에게 만족해하는 바보들처럼, 나의 눈빛에는 평범한 안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나의 이런 모습에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을.
* 그들은 내가 나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그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며 그에게 다가가자, 호자인 사람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 가면 뒤에서는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꿈에서 깨어났다.
* 그들이 내 목을 원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아닌 자신의 목을 원했다면 행복했을 거라고 했다. 그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날이 밝은 때까지 나는 그에게 고국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우리 집을 어떻게 찾을지에 대해, (···)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들과 그들의 버릇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우리는 침착하게, 말없이 서로의 옷을 바꿔 입었다. 그에게 나의 반지와 몇 년 동안 그에게서 감추어 왔던 메달을 건네주었다. 메달 안에는 증조 외할머니의 사진과 저절로 하얗게 변해 버린 내 약혼녀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 소문은 내 귀에도 들어왔다. (···)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들이지요."라고.
*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 (···) 우리가 앉아 있는 방은 한때 우리가 되고 싶어 했고, 되었던 것들의 슬픈 추억으로 가득했다. '그'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고, 이것이 나와 내 인생을 끝까지 불행하게 할 것임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 그는 "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일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의 삶을 바꾼 그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 나는 그를 사랑했다.
* 흑사병이 돌던 시절의 어느 밤, (···) '그'를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파샤의 저택에서 처음 보고 등골이 오싹했던 느낌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우리의 잃어버린 삶과 꿈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다시 상상해야 하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믿는다!
* '그'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터키인들 사이에서 경험했던 경이로운 모험, (···) 터키인과 흑사병, 궁전과 우리의 전쟁 법칙에 대해 많은 책을 썼다고 했다. 귀족들 특히 고상한 귀부인들 사이에 새로이 퍼지고 있는 환상적인 동양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가 쓴 책들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책은 많이 읽혔고, 아카데미에서도 강의를 했으며 부자가 되었다. 더욱이 '그'가 쓴 책들을 읽고 흥분한 옛 약혼녀는 나이도 상관 않고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결혼했다.
* 그는 "이상한 것은 당신이 '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닮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 "당신은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군요!" 그런 후 그는 나를 잊어버렸다. 가끔 나는 곁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그곳 정원에 세 시간 동안 앉아 그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책을 다 읽을 즈음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한두 번 우리의 무기를 삼킨 늪 뒤에 있는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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