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431번.
노르웨이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작가는 A-B-C, A-B-C-D, A-B-C-D-E와 같이 반복적인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 서사를 전개해갑니다. 이는 독자들이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주고, 주제 의식을 심화해나가는 방법으로 활용되어집니다.
<< 멜랑콜리아 Ⅰ >> -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후원을 받아 독일로 유학을 갑니다. 유명한 한스 구데의 제자가 되어 풍경화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지만, 타인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으로 불안해하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 나는 그림을 정말 잘 그린다. 나는 다른 일은 몰라도 그림 하나만큼은 잘 그릴 수 있다. 구데도 그림을 잘 그린다. 오늘은 한스 구데가 내 그림을 보기 위해 올 것이다. (···)나는 한스 구데가 하는 말을 들을 용기가 없다. 만약 한스 구데가 나더러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사람, 그림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림을 더 그릴 수 없다
* 나는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려 내고 싶다. 나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른 학생들은 그림을 못 그린다. (···)이 세상에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나는 구데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문에 구데는 내게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하지 않을까? 구데는 내가 그림에 소질이 없으니 고향인 스타방에르로 돌아가라고 말할 것이다. 예술 아카데미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그는 내게 집으로 돌아가서 그림이 아니라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는 게 나으리라고 말할 것이다.
* 어쩌면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 (···)나는 사물을 잘 볼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심지어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조차도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
* 고요함이 나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내게 신의 자비가 내리면 나는 빛 속에 들어설 수 있다. 그 빛은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빛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빛을 느낄 수 없다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기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빛을 느낄 수 없다면 신의 자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의미지만, 가끔은 빛을 느낄 수 없어도 우리는 신의 자비 속에 있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 나는 당신을 향하고 있다. 나는 당신을 향한 움직임이다. 나는 당신에게 가고 있다.
*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나는 공허한 움직임,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움직임이다. 아니, 그림조차도 공허한 것일까? 이제 내 앞에는 정녕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쩌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다. 내가 화가가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도 이전과 다름없이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실력 있는 화가지만 동네의 집과 옷장, 나무배에 페인트칠을 하며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꼭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 한스 구데는 내 그림 속에 훌륭한 요소가 꽤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내 그림에 단점도 많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볼품없는 그림이라는 것이 그의 솔직한 속내이리라. 그럼에도 그는 내 그림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그 그림도 팔 수 있을 것 같아. 한스 구데가 말했다.
* 자네에겐 큰 재능이 있어. 한스 구데는 내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화가,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 (···)한스 구데는 그림을 잘 그린다. 티네만도 그림을 잘 그린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린다. 나는 하타르보그 출신의 화가 라스. 라스 헤르테르비그.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평생 이렇다 할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나 큰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본다. 그림을 그리기엔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산드베르그 박사는 내게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엔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림 때문에 내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산드베르그 박사에게 햇살 가득한 풍경을 너무나 많이 쏘아보았기에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있을 때는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하던 날 화구를 병원에 맡겼다.
* 하지만 나는 화가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다시 건강해질 수 없다. 내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나는 갈매기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나는 미쳐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 병원에 있고,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 내가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온 것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건강해지기 위해 왔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길 원한다. 나는 화가이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화가,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 나는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그림을 그릴 것이다. 평생.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과 화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 나는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쳐야 한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불행해집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오늘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서 도망칠 것이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 멜랑콜리아 Ⅱ >> -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누나 올리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라스를 떠올리던 올리세는 라스의 그림을 보며 빛과 함께 눈을 감게 됩니다.
* 그녀는 세월이 흐를수록 매일매일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올리네는 이럴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젠 쉬버트마저 세상을 떠날 것이다. 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쉬버트까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 그녀의 남동생 중 한 명은 유명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순간 그가 그리는 그림은 낙서처럼 변하고 말았다.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을 그렸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낙서 같은 그림만 그렸다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거부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삶은 현재가 중요한 법. 올리네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라스는 이상한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미쳐 버린 청년. 사람들은 그를 미친 라스라고 불렀다.
* 나는 다시 집 뒤편의 산과 나무배를 그린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그 그림이 우울할 때의 라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림 속의 산과 나무배는 눈에 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이 가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의 라스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은 어둠에 빠져 있는 라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 걸쇠 옆에는 라스가 그린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말 한 마리.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려도 그보다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배경으로 자리한 황토색 언덕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신경 써서 그리면 라스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라스의 그림 속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라스가 그렸기 때문이다. 올리네는 바로 그 때문에 그 그림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문고리에 걸린 생선 옆에는 라스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 남자와 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산등성이, 그림은 대부분 누런색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스는 어느 날 그녀에게 뛰어와서 이 그림을 주고 갔다. 올리네는 그때 라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음을 기억했다.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서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올리네는 그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라스가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그와 동시에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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