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런던 스케치>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82번.

by 이태연















도리스 레싱은 2007년 88세의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이 작품은 런던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낸 열여덟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단편집입니다. 작가는 런던의 오늘을 선명하게 묘사하며 20세기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사상을 총괄하는 방대한 주제들을 담아냅니다. 뉴욕 타임스는 "레싱은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복잡한 인간관계들을 능숙하게 해독해 낸다."라고 언급합니다.

【 데비와 줄리 】 - 학교 창고에서 남자 친구와 어설픈 관계를 맺은 후 임신을 하게 된 줄리는 가출을 합니다. 역전에서 데비의 눈에 띈 줄리는 결핍과 공허만 가득했던 자신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인 데비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출산이 임박한 시기에 자신을 따뜻하게 보호해주던 데비가 '한 명의 남자 고객'을 따라 여행을 떠나버립니다. 줄리는 허름한 창고 안에서 책에서 배운 내용을 생각하며, 개 한마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 사람들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를 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데비가 그녀를 보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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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 혼자 처음 런던에 도착한 날 자정 워털루 역 플랫폼에 바보처럼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데비가 이곳으로 데려 왔을 때, 옆방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는 저 여자애들처럼 그녀는 순진했었다. (···)그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 "아무 걱정 마, 때가 되면 내가 모든 게 잘 되도록 보살펴줄게." 그러나 데비는 일주일 안에 돌아올 거라고 해놓고서는 새로 사귄 남자와 파리로 떠났고, 뉴욕에서 전화를 걸어 "내 사랑. 어떻게 지내? 주말에 돌아갈게." 라고 말했다. 그것이 삼 주 전이었다. (···)'내 사랑'은 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화를 듣고 있는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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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책에는 물이 쏟아진다고는 쓰여 있지 않았나?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니, 이건 아기구나. 그녀는 손을 밑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깔고 있는 담요 위에 젖어서 미끈거리는 덩어리가 있었다.

* 그녀는 웅크리고 있다가 일어나서 한 팔로 아기를 감싸 안고 한 손으로는 바닥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피 웅덩이 옆에 벌벌 떨며 서서 아기를 높이 그러나 자기 몸 가까이 바짝 안고 두어 발자국 옮겼다. 개가 즉시 자기를 방해하지 말라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앞으로 기어나왔다. 개는 빠르게 후산물들을 삼켰다. (···)그러는 동안 아기는 짧고 성난울음을 터뜨리더니 자기를 감싸고 있는 수건을 맹렬하게 걷어찼다.

* 그녀는 아기를 전화 부스 바닥에 내려놓고 (···)지금 자신이 피 냄새를 너무도 강하게 풍겨 누군가가 눈치 챌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가까스로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이미 흠뻑 젖은 타월로 만든 패드와 속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손님용 타월로 몸을 닦아냈다.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짜서 계속해서 몸을 닦는데도 피가 금세 허벅지 안쪽의 흰 피부 위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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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비가 그녀에게 말했었다. "언젠가는 네 차례가 올 거야." 그러나 지금은 데비의 차례였다. (···)그녀는 '단 한 명의 고정 고객'을 원했다. 한번은 그녀가 실수로 '단 한 남자'라고 말했었고 줄리는 그 말을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데비는 그녀의 험난한 삶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결코 말한 적은 없지만 데비는 나쁜 경험을 했던 거다. 그러나 그녀가 줄리에게 그렇게 잘해 준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했다. 데비 역시 줄리처럼 늦은 밤 기차역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임신한 채 일자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아기를 낳을 것인지 따위의 되지도 않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 또는 임신한 채 혼자 버림받았는지도 모른다. 다섯 달 동안 데비가 사랑하고 보호한 것은 줄리 자신이 아니라 임신한 채 혼자였던 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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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부스에서 갓 태어난 여자 아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아기는 따뜻하게 싸여 있었고 건강합니다. 아기의 몸무게는 7파운드 3온스입니다. 간호사들이 아기 이름을 로지라고 지었습니다." 간호사가 그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것을 보자 격렬한 질투의 물결이 줄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산모는 응급 치료가 필요할지 모르니 속히 병원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늦은 뉴스였다.

* 그녀는 생각했다. 7월에 학교를 마치면 나는 돌아갈 거야. 도망갈 거야. 런던으로 가서 일자리를 구할 거야. 그러면 내 아기를 찾을 수 있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가출했던 그 어리석은 여자아

이가 아니라고. 만사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비가 교육시킨 여자라고 잠시 스스로를 설득했다.

* 난 이제 세상을 알아. (···)난 나를 도와준 것이라고는 개 한 마리밖에 없는 그 창고에서 혼자 로지를 낳았어. 그리고 난 로지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았고 이제 그 애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난 집에 왔어. 난 이 모든 것을 너무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무도 절대 짐작조차 못할 거야. 나는 괜찮아. 줄리는 두 팔로 팬더 곰을 안고 생각했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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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구덩이 】 - 사라는 이혼 후 두 아이를 힘겹게 키워내고 이제 조금 자유로워진 중년 여성입니다. 어느 날 '그냥 이야기하고 싶다'는 이유로 전남편 제임스가 연락을 해 오자 사라는 이유도 모른 채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로즈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떠났던 전남편과의 관계로 인해 다시 현실의 삶이 흔들리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전남편이라는 그 흙구덩이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비밀리에 도보여행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 그녀는 이제 그 모든 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선택이 잘한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자는 어쨌건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하지 않게 되는 것, 그것은 예기치 못했던, 위대한 기적 같은 해방이었다. 그 모든 것, 그 고뇌와 고통, 그리고 밤에 울면서 깨어 누워 있는 것 등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이었나! 그 무슨 엄청난 시간 낭비인가. 여자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진 지금, 제임스는 그녀를 만나러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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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 --그가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 -- 은 그가 모든 면에서 그녀와 정반대인 로즈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몇 년이고 계속될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 "로즈가 그 일은 잘해. 그러니까 가족을 이루는 것 말야." 이 말에 그녀는 분노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녀에게 아이들을 혼자 키운 세월이 어떠했는지를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자는 미소를 지은 채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이제 그녀는 그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 "당신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 삶에는 정말로 무서운 간극이 있어. 몇 년 동안이나 그랬어." 여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메마르게 말했다. "일부다처! 당신이 원하는 거군요!" (···)" 난 당신이 내 삶 속에 있길 원해! 당신이 필요해! 난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어." 그는 여자에게 와서 몸을 굽혀 빰을 그녀의 뺨에 대고 부드럽게 비볐다. 그것은 애인이 아닌 남편의 권리 주장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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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한 가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찿아냈다. 탈출하는 것. 실은, 도망치는 것, 달려, 달려. 이 방에서 이 빌딩에서. 런던에서. 그래, 영국에서 도망쳐. 여자는 이제 의자에서 일어나 갇힌 새처럼 빠르고 어색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 그녀는 벌써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제임스가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아, 그녀를 떠나 로즈에게 갔을 때 그는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 가지고 갔었는가! 그리고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도망가. 여자는 자신을 무섭게 꾸짖고 있었다) 남아서 끝을 보기란 얼마나 쉬운가. 끝을? 어째서 끝을?

* 여자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녀는 보고 있었다. (어떤 장면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어떤 구덩이 또는 함정 위로 어린 소녀의 가냘픈 두 팔이 뻗어 오른다. 황금의 갈색 팔, 검은 머리의 고운 광택·······. 그 아이의 손가락들은 위로 올라오더니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잡는다. 그러자 큰 장화들이 와서 짓밟는다. 두 팔은 아래로 떨어지더니 다시 위로 기어오른다. 강한 손가락들이 푸석푸석한 흙을 움켜쥔다. 그녀가 그걸 붙잡으려 하자 흙은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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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자는 그물과 덫을 짜며 두려움에 미치려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속임수를 쓰며 적수인 사라를 그녀에게로 그 집으로 그 가족에게로 그 다음······ 아이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둘러앉은 커다란 가족 식탁으로 끌어들일 것이었다. (···)로즈는 제임스를 이용하면서 사라 주위에 그물을 치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그녀는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하고 계략을 짤 것이며 자신이 이해 못하는 세상을 위한 덫을 놓을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삶 속으로, 가정으로 끌어당겨 식탁에 앉힐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 그녀는 자살할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명백했다! 처음부터 명백했고 그래서 사라 자신이 그토록 공포에 빠져 있었던 거다. 벗어나기 위해······ 멀리 떠나기 위해······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해두기 위해. (···)여자는 필요한 옷들을 빠르게 챙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일 부동산 업자에게 자기 집을 맡기고 즉시 공항으로 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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