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밤늦게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아야 할 것 같은 날. 당연히 술에 취해 기억도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할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받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날. 한 때 광양에서 같이 인턴을 했던 친구의 전화가 늦은 밤 단잠을 깨웠을 때 불현듯 그런 날임을 알았다.
친구의 목소리보다 먼저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목청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또 술을 마시고 있구나’ 그 친구의 간과 미래를 걱정하며 어떤 잔소리를 해야 하나 고민할 찰나 대뜸 인사 한마디 없이 던져진 친구의 말이 귀에 꽂혔다.
“여자 소개받을래?”
“응”
“그래 그럼, 잘 자”
쉽게 끊어진 전화. 술에 취해 문득 던진 친구의 말과 밤늦은 전화에 쉬이 넘겨받은 말.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는 지인을 통해서 서울에 근무하는 이성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 사람과의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그날 밤에 이르게 되었다. 한 잔 두 잔 부딪히는 술잔에 이어가던 이야기는 그 여성분의 고향인 울산으로 주제가 넘어왔고 울산에 살고 있는 솔로 친구의 이야기, 즉 나와 그 여성분의 친구로 귀결되어 즉석 만남에 이르게 되었다는 어찌 보면 흔하고 흔한 술자리 즉석 소개였다. 물론 그 흔한 이야기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내가 탈모라는 것이고 그 사실을 그 친구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수다. 그 친구도 그리고 나도. 그리고 그 실수가 시작을 만들었다.
다음 날 친구로부터 전해받은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을 하고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중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이번에도 혼자서 사랑인 척하는 난리, 또는 어느 날 문득 깨버리는 꿈’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탈모여서 혼자서 사랑하던가, 탈모여서 알아서 마음 정리하던가. 결국 정해진 2가지 결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엾은 인간. 아니, 대머리.
그러나 매일 밤 이불을 끌어안고 끙끙대던 30대 젊은이의 지독한 외로움이 그 두려움을 이겼다. 또다시 상처 입고 울부짖더라도 잠시라도 꿈을 꾸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혹시나 나의 탈모를 알고 있는 친구가 소개받기로 한 여자분에게 이미 탈모를 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겠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환상도 있었다. 물론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면 바로 확인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마저도 기대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어색한 인사와 간단한 자기소개로 시작된 그녀와의 연락은 며칠간 이어졌고 주말에 만남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녀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롭게 새워진 아파트 단지에 같은 시기에 입주했고 13살인 그때부터 내가 그 아파트를 떠나기 전까지인 17살까지 매일 아침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같은 버스를 탄 사이였다. 물론 단 한 번도 서로 인사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단지 서로의 존재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아이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단순한 과거의 인식도 추억이라는 양념과 운명이란 단어와 합쳐지면 굉장한 망상이 되는데 마치 ‘그녀가 나의 운명이 아닐까’ 내지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기도 전에 운명을 생각하며 첫 만남에 나섰다.
탈모, 가발러가 소개팅에 나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당연히 가발이다. 물론 일반인도 소개팅에 나서기 전에 헤어스타일을 신경 쓰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머리카락에 대하여 절대적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탈모인은 일반인에 비해서 2~3배 더 신경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신경은 소위 ‘간지 나게’ 멋을 부리는데도 쓰이지만 그보다 ‘자연스러움’에 더 집중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평소보다 상대방의 외모에 더 집중하고 신경을 쓰게 되는 소개팅 자리이므로 상대방의 시선은 더욱 날카롭게 나의 머리를 훑기 마련이다. 그 매의 눈길을 넘기기 위해서 이미 생명의 잃은 가발에 한올, 한올 손가락과 빗질로, 때로는 드라이기와 왁스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완성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 주변 사람, 가족이나 친구에게 먼저 내 모습을 보여주며 묻는다. “나 어때 멋있어?”가 아닌 “나 어때, 자연스러워?”로 말이다.
사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머리가 자연스러웠는지 잘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내게 ‘혹시 실례지만 가발이세요?”라고 물어보지 않은 것으로 봤을 때, 첫 만남 이후로 우리가 매주 3~4번의 만남을 이어간 것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내가 탈모임을 몰랐던 것 같다. 그녀를 소개해준 친구에게 확인 결과 나의 머리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탈모라는 사실을 그녀는 짐작하기 어렸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첫 만남 이후로도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변명이었다. ‘나는 속이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하지 않은 것이지, 거짓말한 것이 아니다’와 같은 지독한 자기변명. 그리고 거짓말.
나는 그 거짓말을 안고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