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서울에 있는 업체 말고 여기에는 가발 관리해주는 업체가 없어?”
매번 머리를 자를 때가 되거나 가발을 바꿔야 할 때가 되면 서울까지 먼 거리를 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와이프가 물어왔다. 물론 인구 100만이 넘는 광역시에, 그만큼의 인구에 비례한 탈모인들이 살고 있을 이 도시에 가발업체가 없을 리가 없었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유명 업체의 지점과 또 개인의 기술력으로 승부를 거는 개인 영세사업체까지 합하면 못해도 수십 개는 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서울의 단골가게까지 가는 이유는 유명 업체의 경우 높은 품질과 유명세만큼의 부담스러운 비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고 개인 사업체의 경우 여전히 주요 고객층을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으로 타겟팅 하고 있어 그 스타일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적정한 가격과 젊은 탈모인을 만족할 만한 스타일,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개의 가발업체가 난립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서울로의 상경길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와이프의 거듭된 충고와 걱정, 더불어 서울과의 왕복 영수증을 이용한 가계부 협박에 못 이겨 마침내 지방업체를 찾기에 나섰다. 사실 그 무엇보다 이제 나조차 너무 귀찮았다. 머리를 자르러 서울에 간다니, 이 얼마나 해괴망측하고 웃긴 일인가. 또 한편으로는 10년 간 가발을 쓰면서 쌓인 노하우와 자신감이 어떤 가발도 내 본래 머리처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업체를 만났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업체를 처음 봤을 때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가발 전문 관리업체인 줄 알았는데 웹사이트를 좀 더 둘러보니 탈모인과 비 탈모인 모두를 고객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가발러, 탈모인들끼리도 서로의 벗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숨기려 하는데, 하물며 비 탈모인에게 대머리가 공개되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었기에 망설여졌다. 그러나 100% 예약제라는 안내와 또 ‘탈모인을 대상으로 가발 판매와 더불어 관리까지 하는 업체에서 그 정도 생각이 없진 않겠지’라는 가발러의 상식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전화예약 후 주말에 그 가게에 방문했을 때 일단 위치가 마음에 쏙 들었다. 번화가에서 한 발 비껴선 오피스텔형 상점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는데, 흔히 대로변에 위치한 평범한 미용실과 달리 밖에서는 간판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한창 가발을 벗고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예약도 없이 갑자기 훅 들어오는 그런 불상사는 다행히 없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안심하고 가게문을 열었다.
‘예약시간을 잘못 알았나?’ 반갑게 문을 열어주는 종업원의 미소보다 그 미소 너머로 보이는 다른 손님의 이발 장면 때문에 당혹스러움이 일었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봤던 매장 안 사진과는 달리 매장은 일직선 구조였는데 별도로 대기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손님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받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전 손님의 머리 하는 장면을 뒤에 소파에 앉아 멀뚱히 바라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이 손님은 일반인이어서 내가 뒤에 있든지 말든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그 손님을 바라보면서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도 이렇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껏 탈모 전문 가발업체만 다녔기 때문에 1인 1실, 1인 1타임이 기본인 줄 알았다. 그렇기에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으로 이전 손님은 일반인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미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또 어떤 사정으로 예정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어졌는데 나를 밖에 세워둘 수 없으니, 일단 안으로 들여서 대기를 시키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 가게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고객 님, 앞으로 나와서 여기 앉으실게요”
이전 손님이 샴푸를 하는 사이 실장님이 나를 3개가 있는 미용 좌석 중 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
‘뭐지? 아직 아까 손님이 나가지 않았는데? 설마?’
아직까지 일말의 믿음을 가지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가 안내한 좌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이미 손에서는 홍수가 났다.
“이제 잠깐 지금 쓰고 있는 거 벗으실게요”
“네? 뭐라고요?”
미처 입에서 일말의 비명이 터지기 전에 그의 손이 가발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영혼의 철핀을 어루만졌다.
“딸깍”
반사신경으로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가발이 터뜨린 단말마가 좁은 미용실 안을 메운 뒤였다.
왜 그러시냐는 눈빛의 실장님과 샴푸를 하고 젖은 머리로 들어오는 이전 손님의 흔들리는 눈빛이 흔들리는 가발을 쓴 채 불안한 눈빛을 한 나와 부딪혔다. 아!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그 설마가 가발을 잡았구나!
애써 모른 척, 태연한 척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는 손님을 바라보며 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나. 화를 낸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른 사람이 있는데서 이렇게 함부로 가발을 벗기면 어떻게 합니까? 머리카락 없다고 무슨 부끄러움도 없는 줄 아세요!”
둘. 체념한다.
“아, 가발은 제가 벗겠습니다.”
짧은 고민, 깊은 고뇌 끝에 두 번째를 택했다. 이미 엎질러진 일, 뭐가 잘못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봤자 나만 더 우스꽝스러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저러니까 머리가 빠지지.” 라던가, “대머리가 성격도 더럽네” 하던가. 결국 내 안의 화를 뱉어내 봤자 더 큰 화를 입는 건 내 마음일 터였다.
질끈 눈을 감고 첫날밤 옷고름을 풀 듯이 남은 가발 핀을 풀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가발을 벗어 실장님께 전달했다. 전혀 생판 남 앞에서 가발을 벗다니. 힐끗힐끗 아닌 척 눈을 흘기며 자신의 풍성한 머리를 어루만지는 옆손님을 곁눈질하니, 팬티가 벗겨져 소중한 그 무언가를 남에게 억지로 보여주는 기분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건 잠시 잠깐 잊고 지냈던 참담함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처음 들어와서 만났던 손님은 갔지만 나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손님이 자연스레 들어와 내가 맨 처음 앉았던 소파에 앉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일반이었고 그 역시 이런 광경이 처음이었는지 대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거울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차마 더 볼 수 없어 눈을 또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실장님, 아! 나의 실장님은 새 가발을 가져와 마징가 제트를 합체시키듯 내 머리와 가발을 연결하고는 새 가발, 즉 자신의 가발의 우수성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 비용에 이 정도 퀄리티는 없다는, 내가 이 가게를 선택하게 한 그 빌어먹을 이유를 말이다. 어느 순간 나는 뒤에 앉은 사람이 이 장면을 촬영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어떻게 운전을 해서 집으로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 되었다는 실장님의 얘기에 황급하게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잘 다녀왔냐는 와이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기껏 새로 맞춘 가발을 옷장 속에 집어넣었다. 몇 년 만에 눈물이 핑 돌아서 닫힌 옷장문을 부여잡고 몇 분을, 몇십 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요즘 젠더 감수성이란 말이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 등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뜻하는 말인데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다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배려하는 성숙한 사회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서로의 성별에서 생각하는 그런 성숙한 사회에 왜 탈모 감수성은 없을까. 사회적 약자인 대머리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왜 여전히 부족할까. 왜 탈모인의 입장에서는 생각하지 않는 걸까.
가발을 팔고 또 그 가발을 관리하며 돈을 버는 사람조차도 탈모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한 적도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탈모를 이용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래도 우린 타인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고 또 일반 미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비용을 지불하니까 최소한 공감하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물인 배려를 통해 탈모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려가 없는 것은 TV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탈모는 여전히 재미있고 자극적인 개그 소재로 심심찮게 방송에 나온다. 흑인 분장을 하는 것은 흑인 비하고, 눈을 찢는 퍼포먼스는 동양인 비하라는 것을 알면서 대머리 가발을 써서 대머리를 희화 하하고, 다른 사람 가발을 벗겨 탈모를 드러내는 행위는 왜 대머리 비하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카메라 너머의 그 누군가는 그걸 보면서 누가 자기 가발을 벗겨내는 게 아닐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말이다.
뭐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프로 불편러라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프로 가발러로써 나를 비롯한 탈모인들을 위해서라면 프로 불편러라고 손가락질받아도, 박수를 받는 것처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여성단체 등의 ‘지속적인 목소리 내기’가 젠더 감수성의 사회적 확산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숨어서 끙끙 앓는 이 시대의 탈모인들을 위해 우리를 비하하거나 놀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싶다. 가발 밑에 사람 있다고 우리를 이해해달라고 소리치고 싶다. 그게 세상을 향해 탈모를 외치는 내가 가져야 할 책임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황망하게 도망쳤지만 살면서 그와 같은 일을 다시 겪게 된다면, 탈모를 웃음거리로 삼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이제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탈모 감수성이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