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른 가발러들과의 조우Ⅱ

그릇이 큰 가발러, 권 부장님

by 울산의 카프카

“노 대리, 금년 창립 50주년 행사 때 만찬장에서 쓸 기념 영상 하나 만들어봐. 그리고 김 팀장은 옆에서 자료수집이라던가 요청사항 같은 게 있으면 최대한 서포트해주고”


회사 창립 50주년 행사를 앞두고 전무님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이걸 물류팀인 제가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묻는 나만 바보가 된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일이 아니면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토 달지 않는 것. 그것이 노 대리가 이 회사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었던가!


또 과거 회사 홍보 책자와 브로셔를 제작하며 이미 다양한 사진자료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 자료와 그때의 경험 등을 살리면 꽤나 만족스러운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잘해야 본전, 못하면 두고두고 욕먹을 기념 영상 제작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러나 영상 제작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목표지점만 정해주셨을 뿐이지,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었기에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대해서 일차적인 승인권자인 김 팀장님과 의견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타회사 기념 영상을 참조하되, 우리만의 영상을 만들어보자는 나와 기본에 충실하자는 김 팀장님.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는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초조감이 더해가던 날이었다.


“팀장님. 이건 어떨까요? 사실 우리 회사 행사에 고객이라던가, 주요 서플라이어들이 참석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소위 우리만의 행사인데 거기에 굳이 뭘 했고 뭘 만들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

“사람 위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주요 내빈들이 과거 회사에 근무하셨던 선배님들이시고 대부분의 참석자가 지금 현재 근무하고 있는 내부인입니다. 예전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과 현재 우리들의 모습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구성하면 반응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남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 이야기니까요”


방향이 정해지자 일에 속도가 붙었다. 김 팀장님은 오랜 직장경력을 토대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희귀한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고 더불어 폭넓은 인맥을 활용해 필요한 사진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제작업체와 미팅하며 인트로 장면과 회사의 연혁 등 기초적인 영상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김 팀장님과 나는 클라이맥스에 들어갈 사진들의 선별작업에 착수했다.


“팀장님, 그런데 이 사진의 이 분은 누구시죠? 자주 등장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노 대리, 이 사람 몰라? 권 부장이잖아. 권 부장님.” 김 팀장은 20년 전 사진을 보며 질문하는 내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 분이 서울사무소의 권 부장님이라고? 그러고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근데 권 부장님은 설운도 스타일의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여기 이 사진의 사람은 빡빡머린데 어떻게 권 부장님일 수가 있지? 아! 설마?

“이분이 서울사무소의 그 권 부장님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몰랐어? 흐흐. 노 대리는 모를 수도 있겠네. 노 대리가 입사하기 전부터 가발을 쓰셨으니까.” 김 팀장님은 손으로 머리를 덮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감쪽같지? 역시 말 안 하면 모른다니까! 나도 처음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가발을 쓰고 왔길래 웃기고 이상하다고 벗으라고 했는데 계속 보니까 진짜 모르겠더라고. 이렇게 사진으로 옛날 모습 보니까 생각나네. 하하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입장 바꿔서 30년 뒤에 회사 발전을 위한 선배님들의 노고를 기린다며 호텔에 날 초청해놓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내 과거 대머리 사진을 스크린에 크게 띄워 우스갯거리로 만든다면 나는 먹고 있던 스테이크를 도로 뱉을 것 같았다. 이건 같은 탈모인, 가발러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팀장님. 이 사진들은 빼시죠.”

“권 부장 옛날 모습들이 들어간 사진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진들을 다 빼자고? 뭐 그렇게까지 해. 다 웃자고 하는 건데. 노 대리 말대로 사람들이 보고 좋아할 것 같은데 왜 그래?”

“아니, 저희 좋자고 권 부장님을 난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얼마나 당황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저처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요.”

“괜찮아. 괜찮아. 다 이해하실 거야.”


뭘 다 이해한단 말인가. 풍성한 곱슬머리를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머리숱이 많아서 더 꼬이는 것 같다고 투덜대는 사람이 어떻게 탈모인의 마음을 알겠는가! 아무리 윗사람의 지시대로 사는 상명하복의 노 대리라도 1,000만 탈모인의 대표로 할 말은 해야 했다.


“권 부장님의 승인이 없으면 저는 영상제작에 그 사진들을 사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팀장님.”

“뭘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고 말을 해. 알겠어, 알겠어. 내가 지금 전화해서 사진 사용해도 되는지 허락받으면 되는 거지?”

김 팀장님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권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폰으로 연결했다.

“여보세요. 아, 권 부장님. 김 팀장입니다. 잘 계시죠? 아, 다름이 아니라 금번 50주년 행사 때 사용할 기념 영상을 제작 중에 있는데요. 거기에 클라이맥스로 지난 50년 간의 우리 회사 사람들의 모습을 담으려고 해요. 그래서 말인데 권 부장님의 옛날 사진들을 써도 되나 해서요. 권 부장님께서 우리 회사를 위해 좀 많이 활동하셨어야지요. 회의든, 행사든 뭐 권 부장님이 빠지시는 사진이 없으시구먼. 하하”


물어보나 마나지. 어느 가발러가 자기 대머리 때 사진을 보여주려고 하겠나. 텔레비전도 안 보시나. 누구나가 다 아는 대머리, 가발러 중에 TV에서 가발을 벗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란 말이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다.

“김 팀장. 굳이 내 사진을 써야겠어? 허참. 취지는 좋은데… 꼭 굳이 써야겠다면 내가 나오는 사진들은 짤막하고 작게 좀 표현해줘.”

엥? 이건 무슨 말씀이신가.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듣고 있던 나는 당황해서 스피커폰이 켜진 전화기에 대고 급히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권 부장님. 노 대리입니다.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무리할 필요 없으십니다.”

“오, 노 대리. 잘 있지? 아냐, 뭐 필요하면 쓸 수 있지. 회사일로 하는 건데 나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한테 불편을 끼칠 수 있나. 마음껏 써. 아니 또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막 쓰는 거 아냐?”

“그것 봐. 노 대리. 권 부장님도 괜찮으시다고 하시잖아. 네. 권 부장님. 잘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전화를 끓은 김 팀장은 내게 사진 선별과 업무 진행에 대해 몇 가지 지시를 더 했지만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동양상 제작을 완료하고 경영진의 최종 승인을 받을 때까지도 풀지 못했다.


행사 당일, 야외행사를 마치고 내외빈 고객들을 모시고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오프닝 행사와 내외빈 소개, VIP 인사 말씀 등을 거쳐 드디어 50주년 기념 영상이 상영됐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회사의 변천사와 대외활동에는 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야심 차게 준비한 50년의 얼굴들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야. 그래 우리가 저런 때가 있었지.” “이 부장도 저 때는 젊었었구먼.” “저 양반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저 사진은 언제 적 사진이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잘생겼네”

그리고 역시 제일 큰 웃음은 권 부장님의 사진들에서 나왔다.

“권 부장. 저 때는 머리가 시원시원했구먼!” “지금도 괜찮지만 옛날도 남자답고 좋구먼”

그리고 끝까지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들어가고야 만 과거의 권 부장과 현재의 권 부장의 줌아웃 비교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사람들의 함박웃음과 함께 기념 영상,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영상은 성황리에 끝났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권 부장님께 죄송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권 부장님을 찾아갔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노 대리. 고생했어. 영상 잘 봤어. 그리고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내가 사진 쓰라고 허락도 했는데 뭐.”

권 부장님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인 나를 다독여주었다.

“노 대리, 내가 이 회사를 다니면 앞으로 더 얼마나 다니겠나? 오늘 같이 좋은 날 전역하신 선배님들, 그리고 앞으로 이 회사를 이끌어갈 젊은 친구들한테 시원한 웃음 선물 한 번 줄 수 있었으면 그걸로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릇이 달랐다. 하늘은 그에게 큰 그릇을 만들어주기 위해 부족한 재료를 머리카락에서 보탰던 걸까. 나도 20년 뒤에는 그와 같이 머리카락은 좀 없어도 그릇은 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를 뒤로 한 채 걸어가던 권 부장님은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신 듯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인마. 마지막에는 그 장면은 좀 빼지 그랬냐? 하하하”

권 부장님의 너털웃음이 밤하늘의 별처럼 가슴에 떨어지는 밤이었다.

캡처.PNG 창립50주년 행사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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