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탈모, 가발러의 어느 평범한 여름날

by 울산의 카프카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머리를 긁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긁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고 있을 때면 그 손을 자연스레 이마 위로 올려 머리를 쓸어 넘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특히 상사에게 왕창 깨지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나, 타 부서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업무 요청을 받았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탈모, 가발러인 내게 그건 말 그대로 욕심이다.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가발이 벗겨질 수 있으니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뿐이다.


때로는 간접경험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도 한다. 대상자는 내 앞에 앉은 후임이다. 이 친구는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머리카락으로 보면 이십 년은 어리다. 그는 가끔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밑에 입술을 위로 말아 ‘후’하고 바람을 불어 올린다. 그러면 그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하늘로 한 차례 떠올랐다가 부드럽게 내려온다.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거나 정수리를 두들기며 두피 마사지를 한다. 보면 볼수록 부럽고 또 부러운 모습이다. 너는 알까. 네가 내 일머리를 부러워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가 네 머리카락을 부러워한다는 걸.


이 날은 아침부터 희한했다. 아침부터 보고서를 한 손에 쥔 채로 본부장실 방문을 열고 뛰쳐나오신 전무님이야 늘 그랬던 일이고 그 보고서를 내 눈앞에 흔드시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성 내시는 것도 일상 다반사지만 그 이후로 이어진 이야기는 평소에 없던 추임새였다.

“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야. 보고서를 쓰라고.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보고서. 이런 보고서로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 노 대리는 이게 이해가 되나? 근데 넌 머리가 왜 이래?”


순간 가발을 안 쓰고 왔나 싶어 놀란 가슴에 무릎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네, 죄송합니다.’ ‘네, 죄송합니다.’를 멈추고 머리를 매만졌다. 손끝에서 매만져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 다행히 가발은 올려져 있었다. 하긴 머리를 안 쓰고 왔으면 이미 난리가 나도 몇 번이나 났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이 여름에 덥수룩하게 머리가 왜 이렇냐고. 머리를 좀 단정하게 하고. 저기 철영이처럼 이마도 시원하게 까고 말이야. 머리스타일이 답답하니까 보고서도 답답한 거 아니야!”


생전 머리스타일 얘기를 한 적이 없으신 분께서 머리까지 들먹이시는 걸 보니 엊그제 올린 보고서가 참으로 많이 답답하셨나 보다 싶었다. 지금 당장 머리를 위로 올려서 이마를 까라는 얘기가 나오기 전에 우렁차게 대답했다.

“넵! 전무님. 보고서도 헤어스타일도 시원하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혀를 차며 돌아가는 전무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고서는 오늘 남아서 잔업하며 다시 한번 수정하고 머리는 내일 아침 좀 일찍 일어나서 올려보기로 다짐했다. 와이프와 좋은 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평소와 달리 긴 시간을 들여 가발을 스타일링 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명하복. 윗사람이 지시하면 따르는 평범한 직장인인 것을.


하루의 시작이 그랬기 때문일까? 점심때쯤 사무실 에어컨 시스템이 고장 났다. 며칠 전부터 설정온도가 되기도 전에 알아서 꺼지면서 힘들다는 신호를 주더니, 시간 날 때 한 번 봐주겠다던 유지보수팀이 오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8월 초. 극심한 더위 한복판에 잠이 든 에어컨 탓에 사무실 온도는 급격하게 올라갔다.

덥다. 이 땡볕더위에 밖에서 근무하시는 근로자들의 고통이야 당연히 지금의 나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힘드시겠지만 준비 없이 비를 만난 것처럼 아무런 대비 없이 이 더위를 마주친 나 역시도 숨이 막혀왔다.


사무실 내 전자 기계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통풍을 고려하지 않은 꽉 막힌 사무실 구조설계와 더불어 일에 찌든 직장인들이 만들어내는 분노가 합쳐져 사막과 다름없는 온도를 구현해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이 책상 위에 있던 보고서에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맞은편에 앉은 철영 씨가 나와 같이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물어왔다.

괜찮겠냐. 이 녀석아. 아침부터 배불리 먹은 전무님 잔소리에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와있어서 몸의 온도가 5도는 더 높은 것 같구나. 무엇보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머리에 뚜껑을 뒤집어쓰고 있단다. 열기를 식히려 바깥으로 나온 땀이 내 정수리와 가발 사이에 갇혀 애처롭게 울부짖고 있구나. 제발 내보내 달라고.


이런 내 속마음과 달리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않는 선배의 지위와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지도 말씀이다.

“가만히 있으니까 시원한데 뭘. 이 정도면 일할 만하지.”

흠뻑 젖은 a4 보고서라도 좀 치우고 얘기하시지라는 표정을 짓던 철영이는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얘기했다.

“죄송한데, 대리님. 저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잠깐 씻고 올게요. 제가 땀이 많아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머리라도 감아야 될 것 같아요”


뭐 씻으러 간다고? 이 부러운 자식. 나는 잠깐, 정말 10초만이라도 가발을 벗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 불쌍한 내 정수리에 바람이라도 쐬어주면 좀 좋겠냐만은.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 가여운 내 머리. 처량한 내 신세. 애처로운 이 가발러여!

철영이가 샤워실로 간 이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귀에는 샤워부스에서 떨어지는 물이 철영이의 두피를 시원하게 때리는 물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얼마나 시원할까. 지금쯤이면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두피 사이사이를 샴푸로 문지르고 있겠지. 지옥 같았던 사무실 열기도 지금 이 천국을 위한 준비단계였다고 생각될 터였다. 샴푸를 씻어낼 때는 또 어떨까. 한 여름 아스팔트처럼 한껏 열받았던 머리는 첫물질과 샴푸질로 한껏 기가 죽었다가 샴푸를 씻어내는 물과 함께 마침내 아스라이 사라지겠지. 그리고는 수건과 헤어드라이기를 통해 보송보송한 두피와 머리카락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아. 이 부러운 녀석. 부럽고 또 부러운 녀석.


철영이가 자리를 비운 지 5분도 되지 않았을 텐데 5시간은 된 것 같았다. 떠올리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두피를 두들기는 찬물과 헤어드라이기의 바람 따라 살며시 흔들리는 철영이의 머리카락의 환영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차라리 눈에 보이면 덜 할 텐데, 상상력이 만들어낸 상상 샤워가 샤워에 대한 더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해버릴까’ 눈 딱 감고 나도 샤워실로 가버리는 거다. 철영이가 샤워장에서 나오고 나면 또 들어갈 만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 10분. 아니 5분이면 된다. 군대에서 전투 샤워하듯이 1분 안에 옷과 가발을 벗어서 옷장 안에 쑤셔 넣고 2분 안에 두피와 머리를 찬물로 식히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는 데는 1분이면 족하다. 말릴 머리도 없으니 헤어드라이기가 뭔 필요가 있나. 옷 입고 다시 가발을 쓰는 데는 1분. 5분 컷이다. 나는 할 수 있다!


아니다. 정신 차리자 노성종. 넌 지금 더위를 먹은 거다. 그래,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경거망동한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 네가 지금까지 이 회사에서 가발인 것을 안 들키려고 어떻게 잘 참고 또 버텨왔는데. 만에 하나라도 샤워하는 중이나 가발을 쓰는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걸리면 어떻게 할 거냐?

“어이쿠. 이게, 이 가발이 이게 왜 여기 있지? 하하하” 하고 넘어갈 것이냐?

그리고 씻고 나온 네 머리가 샤워장 들어갈 때와 똑같다면 그건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아니면 대학생 시절 기숙사 샤워실에서 몰래 쭈그리고 앉아 가발을 빨던 것처럼 그렇게 가발을 씻어낼 생각인 거냐. 참아야 한다. 이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야 한다.


“대리님, 저 다녀왔습니다.”

끙끙대며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내게 다시금 철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를 했다고는 해도 업무시간 중에 샤워를 하러 갔다는 불편함 때문인지 머리도 채 말리지 않고 급하게 나온 듯했다.

“자식, 시원하냐? 이왕 간 거 천천히 다녀오지. 무슨 샤워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그렇게 금방 갔다 오냐. 머리 제대로 안 말리면 머리털 빠진다.”

“대리님이라도 같이 갔으면 좀 마음 편하게 씻었을 텐데. 혼자 가니까 눈치 보이잖아요. 대리님도 다녀오세요. 진짜 시원해요.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너라도 시원해서 다행이다. 좀 있으면 시원해지겠지. 집에 가서 씻지 뭐.”

“오늘 잔업하신다면서요. 아니면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세요. 샤워하고 오는 길에 들렀는데 화장실 통풍창 때문인지 진짜 여기보다 백배는 시원해요”


이 바보 같은 녀석.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늘과 땅. 여성과 남성. 천사와 악마. 이런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갇혀서 샤워 아니면 애써 참기 두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탈모를 가발이란 제3의 방법으로 비껴선 것처럼 그 중간의 방법도 있는데 말이다. 이러니 노상 전무님한테 혼이 나지.


급한 마음에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사무실 내부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옆에 붙어 있는 샤워실의 안내판이 내 시선을 끌었지만, 이루지 못할 꿈은 접어뒀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나는 100% 리얼리스트다.

다행히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맨 구석에 위치한 대변기 사로로 들어갔다. 철영이 말이 맞았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통풍을 위해서인지 사무실과 달리 큼직하게 달아놓은 창문을 통해 시원한 바깥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에 내 몸을 맡기고 바지를 입은 채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물을 내렸다. 그리고 쏴아 내려가는 물소리에 맞춰 가발 핀의 봉인을 풀었다.


“딸칵”


가발 봉인해제의 청량한 소리가 물소리에 묻혔다. 그리고 목줄이 풀린 가발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가발의 비상! 달을 향한 인류의 소망이 아폴로 11호가 되어 날아간 것처럼 두피의 자유를 향한 내 작은 소망이 여기 이 화장실 구석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와” 나도 모를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인간의 희로애락에 대한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무님께 혼나면 뭐 어때? 수정하고 다시 하면 되지. 떨어진 주식? 떨어졌으면 또 오를 때가 있는 법. 사내대장부가 일희일비해서 어디에다 쓰겠는가. 아파트 대출금? 이번 달 생활비? 돈보다 더 중요한 가족과 꿈이 있는데 돈 좀 없다고 기죽으면 안 되지.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탈모라는 것도, 왼손에 벗은 가발을 돌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온전한 자유에 내 몸을 맡겼다. 온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졌다.


잠시 후 나는 휴지를 돌돌 말아 정수리에 남아 있는 땀을 닦아내고 다시 가발을 썼다. 그리고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는 나를 보며 철영이가 물었다.

“대리님, 급하게 어디 다녀오셨어요? 팀장님께서 아까 보고서 때문에 찾으시던데?”

나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응, 화장실!”


어느 여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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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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