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평범한 대리+평범한 가발러=특별한 노 대(머)리

by 울산의 카프카

나는 서른여섯의 남자다. 그리고 200명 남짓의 한 화학회사의 8년 차 대리다. 이렇다 할 큰 사고 없이 그리고 이렇다 할 큰 업적 없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세상 그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직장인이다. 누군가에게는 친절한 노대리로, 또 어떤 사람에게는 원리원칙을 지키는 조금은 답답한 거래처 직원이기도 하고 후배에게는 젊은 꼰대답게 깐깐한 선배이기도 하며 윗사람에게는 그래도 이제 한 사람 역할을 하는 믿을 수 있는 아랫사람이기도 한. 그런 지극히 보통의 회사원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아침 가발을 쓰고 현관문을 나서는 15년 차 탈모인이자, 10년 차 가발러다. 가발이 흐트러지지는 않았을까 중간중간 거울을 보며 가발을 매만지고 가발 아래 찬 땀을 닦으러 화장실 변기에 숨어 가발을 벗고 두피에 숨을 공급한다. 주위에서 머리카락에 대해 얘기하면 괜히 내 얘길 하는 것 같아 숨을 죽이고 행여 가발이 벗겨질까 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그런 지극히 보통의 가발러다.


평범한 회사원과 평범한 가발러가 합쳐지면 더 이상 평범하지가 않다. 이제 나는 스페셜해진다. 국정원 직원처럼 매일매일 나 혼자 비밀작전을 수행한다. 내게 떨어진 명령은 단 하나, 회사 그 누구에게도 내 본 정체인 탈모 가발러인 것을 들키지 말 것! 출근 전 가발과 머리를 제대로 도킹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전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가발과 나를 분리하여 가발 걸이대에 가발을 정상적으로 걸어둘 때까지 행해진다.


다행히 나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평상시에는 크게 긴장할 일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전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때때로 사무실을 벗어나 현장에 나가며 안전모를 벗고 쓸 때 안전모와 함께 가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은 물론이요, 회식으로 인해 아무리 술이 만취하더라도 가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내 머리에 가지 않도록 늘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을 유지해야 하고 대화 주제가 탈모일 경우 서둘러 화제를 자연스럽게 전환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간중간 가발의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긴 연휴를 기회로 가발을 교체하며 ‘노 대리는 왜 항상 머리스타일이 똑같지?’라는 자라지 않는 내 가발에 대해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야 한다. 그렇게 엄격한 자기 관리와 철저한 가발 관리를 통해 8년 동안 나는 이 회사에서 평범한 노 대리로 가장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노대(머리)리다.


다른 사람에게 내 가발 정수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회사 내 계단을 이용할 때도 주의하는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발임을 밝혀질 위기는 회사생활 도처에 깔려 있다. 특히 위험할 때는 회사 안전교육 시간이다. 화학회사의 특성상 긴급상황을 대비하여 주기적으로 안전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이따금 방독면 착용 실습을 할 경우가 있다. 가발을 쓴 채 방독면을 완벽하게 착용하고 가발이 흔들리지 않게 방독면을 벗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모든 절차와 결과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 것. 이것은 10년 차 가발러인 내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다. 방독면을 벗을 때 열이면 열, 가발이 함께 벗겨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독면 착용 실습 때는 지명되지 않도록 강사의 눈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인다. 어쩔 수 없이 강사와 눈을 마주쳤을 때는 급한 전화가 온 것처럼 핸드폰을 볼에 댄 채 급히 교육장을 빠져나가기 일수다. 때로는 감기몸살을 핑계로 안전교육을 빠지고 대신 리포트를 제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날은 퇴근길에 둘러 맨 가방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안전교육보다 더 무서운 건 단체 활동이다. 축구나 족구와 같이 가발을 쓴 채 뛰어야 하는 체육활동은 물론이거니와 1박 2일 회사 워크숍처럼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할 경우도 곤혹스럽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발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가발을 쓴 채 잠을 자면 이게 잠을 잔 건지, 눈을 감고 다시 뜬 건지 녹초가 되기 십상이다.


특히 싫은 건 단체 활동 후 함께 목욕을 할 때다. 봉사활동이나 체육활동 후 다 같이 목욕을 할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럴 때는 도저히 나 혼자만 안 씻는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 온다. 그러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단체 목욕탕으로 향한다. 상의를 벗을 때 가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벗는 건 차라리 애교다. 가발을 쓴 채 샤워부스의 물을 맞으며 머리를 감을 때, 아! 그때의 그 찝찝한 기분이란! 가발을 타고 흐르는 물이 내 눈물과 겹친다. 샴푸를 짜내 가발을 감을 때 흔들리는 가발을 한 손으로 잡은 채 다른 손으로 비벼가며,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가발을 감으면 가발이 상할 텐데라는 걱정과 이 가발을 다시 어떻게 조심스럽게 말릴지에 대해 걱정하는, 애달프고 애처로운 탈모인, 가발러 노 대리여.


이렇게 직장 생활할 바에 차라리 떳떳하게 확 가밍아웃 할 것도 생각했다. 직장인이 일만 잘하면 되지. 탈모, 대머리, 가발을 쓰는 게 뭐가 어때서? 내가 죄를 지었나? 머리카락이 없다고 회사에 폐를 끼쳤나? 내가 뭐 빠지고 싶어서 빠진 건가? 머리카락 없는 게 내 탓이야? 그래, 남들 다 있는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소리치는 거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딸칵, 딸칵. 조용한 사무실에 내 가발의 가발 핀이 봉인 해제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한 손에 벗은 가발을 움켜쥐고 비장하게 말한다.


“지금까지 저 노 대리, 여러분을 속여왔습니다. 저는 사실 대머리, 탈모인입니다. 그리고 제 왼손에 들린 것처럼 저는 지금까지 이 가발을 쓰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입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제 자신을 숨겨온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회사와 그리고 가족 같은 여러분을 기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떳떳하게 여러분 앞에 서고자 고백합니다. 저 노 대리, 가발러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내 고백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동료들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역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망상이겠지. 애써 웃음을 참느라 숨 넘어가는 동료들의 괴로운 소리와 황당한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한 사무실을 채울 게 분명하다. 여전히 우리나라의 탈모 감수성은 현저히 낮고 탈모와 가발은 위로와 응원의 대상이 아닌 놀림과 동정의 상징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이 덥거나 춥거나, 태풍이 오고 무더위가 덮치고 장마를 겪을 때도 가발을 부여잡으며 그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이겨온 내 지난 시간이 아쉽고 불쌍해서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 고백할 수가 없다. 그러니 뭐 별 수 있나? 오늘도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가발을 꽉 부여잡고 나 혼자만의 비밀작전을 이어갈 수밖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특별한 노 대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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