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자. 진정 이대로 살 자신이 없었다. 인간이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처럼 사람이 무섭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바퀴벌레처럼 피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죽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자연스레 탈모약을 권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 점차 위축되어가는 나 자신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애당초 탈모를 인정하고 미련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모를까 탈모 치료를 위해 노력한 지난 1년은 어떻게 보면 탈모라는 불을 켜 놓은 채 남아 있는 나를 녹여내는 양초 같은 삶이었기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하얗게 다 불태운 것이다. 머리카락에 대한 집념만 남겨 놓은 채.
머리에 관한 그 어떤 말도 쉬이 들을 수 없었지만 가장 상처가 되었던 말은 ‘이왕 이렇게 된 것 깔끔하게 밀어버려라’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것이 참으로 우스운 게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나에게는 그것이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너무나 소중했다. 가지고 싶고 더 가지고 싶고, 내 손에 들어오면 꽉 움켜쥐고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데 그것을 밀어버리라고? 어차피 별로 없으니 아예 확 다 밀어버리라고? 나는 그 사람들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만약 당신이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해서 이제 주머니에 몇 푼 밖에 안 남았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어차피 망했으니 당신 주머니에 있는 푼돈도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남은 머리카락을 버리라는 사람들의 말은 탈모 말기 환자인 내게 너무도 잔인한 요구이며 요청이었다.
어떻게든 부여잡고 있던 삶의 의지를 끊어버린 것은 우습게도 우연히 복도에서 들은 여자 후배들의 대화였다.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문고리 틈으로 흘러나오는 그들의 대화에 자꾸만 떨어지려는 심장을 잡아 세워야만 했다.
“성종 선배 머리 봤어? 야! 하나도 없더라. 진짜 안쓰럽게.”
“그 정도면 자기도 알지 않나? 모자라도 좀 쓰고 다니지. 볼 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복도 밖으로 비집고 나오는 그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에 나의 세계는 정지했다.
1초가 1시간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뿌려두었던 흑채와 회의 주제를 뒤로 한 채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매일 같이 머릿속을 맴돌던 머리카락도 이때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걷기만 했다. 잠시라도 멈춰 서면 그 웃음소리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 시간 뒤에 나는 소주 2병을 가지고 원룸 옥상 위에 서 있었다.
술을 마셨다. 한 모금을 마시고 지난 삶을 떠올리고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왕 죽기로 결심했으니 괜스레 유난 떨 것은 없었으나 왠지 지난 삶을 돌아보고는 싶었다. 최선을 다한 삶은 아니었으나 열심히 산 인생이었다.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 다르리라.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까. 그날따라 유난히 소주는 달고 못다 한 꿈은 자꾸만 손짓한다. 유서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그래도 전화라도 한 통 해야 하지 않을까, 애달픈 내 인생을 위해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며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다가도 머리를 만져보면 그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어느새 술이 비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곧추세우고 난간 위로 올라섰다. 하하호호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보니 그토록 참아왔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나도 머리카락이 있었으면 달라졌을까? 나도 머리카락이 있었으면 이렇게 죽으려고 난간 위에서 서 있지 않고 저들과 함께 웃으며 거리를 지나고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렇게 사람이 죽는다고 올라와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손짓하며 죽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하던데 그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일은 다르겠지. 20대 한 대학생의 자살이라는 신문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것이다. 기사에는 ‘내 머리카락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다’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내 관이 나가는 길에는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자신의 소중한 머리카락을 잘라 뿌려 줄 것이었다.
‘오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아, 부디 하늘 위에서는 머리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를’
왼발을 들어 허공으로 내딛는다.
이제 진짜 간다.
그런데 잠……….깐! 정말 그럴까?
‘대구의 20대 대학생, 탈모 비관 자살’이란 기사를 읽으면 사람들은 나를 위해 슬퍼할까?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아니겠지. 그 고통을 모른다면 그 정도 시련도 견디지 못한 나를 조롱하겠지. 내 주변 사람들도 당분간은 나를 위해 슬퍼하겠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나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술자리 안주 삼아 ‘너 기억나니? 그 있잖아, 탈모 때문에 자살한 성종이.’ 를 말하며 단편적인 나를 추억하게 될 것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한 발짝을 더 내민다면 결국 24년의 내 삶은 태어나 살다가 탈모 때문에 자살하기 위한 삶이 되는 것이었다.
궁금해졌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탈모로 자살하기 위해 태어났을까? 이 나의 죽음이 전국에 고통받는 탈모 환자들에게 획기적인 상품을 전해주는 어떤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일까, 아니면 20대, 30대 청춘들에게 두발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단지 탈모 환자의 비겁한 자살로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왜 태어나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다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지금 이 난간 위에 서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용을 쓰고 있냐는 말이다.
마침내 나의 한 걸음이 내디뎌졌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은 앞이 아닌 뒷걸음질이었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 때까지만, 도대체 내가 왜 태어나서 살았고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될 때까지만 살아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어쩌면 허공에 한 발 내딛고 내린 이 모든 생각과 결론들이 다 변명일지도 모른다. 눈에 어른거리는 내려가는 계단과 아직 못해본 많은 일들에 대한 미련과 그리고 나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만들어낸 거짓말. 용기 없는 내가 수십 년 후에 기억도 하지 못할 대화 내용을 가지고 소주를 마시고도 나조차 이성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탈모 자살에 대한 실패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 결국 나는 내려왔고 살아남았다. 다음날 숙취해소를 위해 살겠다고 먹은 해장국은 참으로 시원했고 또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