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가 그러하겠지만 내 인생도 쉬이 흘러오지 않았다. 나는 편부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 큰 빚을 내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후에 국제결혼을 통해 재혼을 하셨고 내겐 아들뻘의 동생이 생겼다. 대학시절 공영방송을 통해 어머니를 찾았고 그 여파로 한 학기를 쉬었다.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내게 있어 인생의 가장 큰 굴곡과 어려움은 앞서 언급된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탈모였다. 내게 일어난 다른 일들이야 이해하고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탈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나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왜 하필 벌써 빠지기 시작한 거야! 왜!”
나는 이 탈모로 참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여름날의 바닷가. 분홍빛의 러브 캠퍼스. 젊음의 상징인 노란색 염색머리와 신사의 대명사인 포마드. 남자의 진솔한 공간인 목욕탕과 한 번쯤 배워보고 싶었던 수영. 그리고 고백도 하기 전에 포기해야 했던 짝사랑까지.
다행히도 나는 가발을 만났다. 가발을 만났기 때문에 나는 탈모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고 계속 포기해야만 했던 삶에서 다시금 무언가를 이뤄가는 삶을 만들 수 있었다. 가발을 쓰고 면접을 보고 직장을 얻었다. 그리고 그 직장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비록 내 머리를 유행 따라 염색이나 파마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가발을 새로 구입하며 대리 만족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욕탕을 가야 할 경우에도 가발이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여자 친구가 생겼고 그 사람과 결혼이란 결실을 맺었다. 이 모든 것이 가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가발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장모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화들짝 놀라서 가발걸이를 치우고 급히 가발을 눌러쓰는 나지만, 가발이 없었다면 이렇게 '놀라는 나'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십 대의 그 언젠가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듬성듬성 난 머리를 수줍은 듯 만지작 거리며 면접장에서 면접을 보고 있는 나는 과연 취업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와이프는 나와 소개팅 자리에서 급히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전에 소개팅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살아 있었을까.
저울과 저울 침처럼 불운은 또 그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행운을 동반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빠지지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다행히 나는 가발을 만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 탈모인들과 또 걸어갈지도 모를 가발러들에게 이렇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대머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맨날 가발을 쓰고 다니는데 무슨 결혼을 하고 취업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 가발러도 사랑할 수 있고 직장을 다니고 그렇게 대머리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그 증거다.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질문했었다. 그리고 할 수 없다고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는 탈모인 그 누구보다 감성적인 사람으로서 탈모로 인한 좌절과 절망의 늪, 그 감정의 바다에서 개헤엄을 쳐 본 나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만큼 힘들어한 사람도 견뎌냈고 남들처럼, 정상인들처럼 우리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술에 취해 수십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가발이 벗겨져봤고 연모하는 여자 앞에서 흑채를 뿌리다가 걸려도 봤다. 시내 한복판에서 나뭇가지에 가발이 걸려도 봤고 해외인턴 중에는 빨아둔 가발을 동네 개가 물어간 적도 있었다.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한참을 몸부림쳐야만 떨칠 수 있는 이런 치욕스러운 순간들을 죽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탈모라고 포기했으면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이루고 또 이뤄나가고 있다.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토끼 같은 와이프와 그리고 탈모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할 수 있다. 대머리라고, 가발러라고 꿈과 인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탈모인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증거로써 계속해서 가발을 쓰고 열심히 살아가고자 한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없을 뿐 생명과 삶이 없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