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지 못했는가.
일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내게 이 시점에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면 학교를 그만두면 되지 않아요?
심지어 나는 정교사도 아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계약직, 기간제 교사이다.
힘들면 그만두거나 쉬었으면 되는데 나에겐 왜 그만둔다는 옵션이 없었나.
엄마가 초등교사인 집에서 나는 어린애들이 싫어서 사범대에 진학하며 교사의 가업을 잇게 되었다.
(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나에 대한 탐구가 무척 부족한,
그저 말 잘 듣는 의존적인 둘째 딸이었다.)
인생을 먼저 산 우리 엄마의 교직 생활을 살펴보자.
엄마는 교직에 42년 동안 계시다가 교감으로 정년을 다하셨다.
엄마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유일하게 일을 쉬었을 때는 우리를 낳으러 갔던 때와 우리가 걷기 전에 키웠던 잠깐의 그때뿐일 거다.
엄마가 42년 동안 한 가지의 일을 하는 동안 아빠의 직업은 열한 번이 바뀌었다.
와중에 언니와 나, 남동생이 자식으로 줄줄이 딸려 있고, 가장 큰 방에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다.
일곱 명의 대가족이 집을 꽉 채우던 그런 때,
결혼으로 출가했던 셋째 고모와 넷째 고모까지 우리 집에 같이 살았으니 아홉 명의 대가족이 우리 집에 살고 있었다.
거대 가족의 맏며느리이자
야망이 넘치는 남자의 아내,
세 아이의 엄마,
회사에선 40-50명의 담임 선생님.
엄마에게 달린 타이틀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것 기분 탓일까.
가끔 엄마라는 사람이 원래 강한 사람이었던 건지,
상황이 엄마를 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건지 헷갈리곤 한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퇴직을 고려한다는 30년 차에 엄마의 갱년기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신나게 대학 생활을 하던 나에게 엄마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아냐, 엄마.
엄마는 일을 좋아하잖아.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우울증에 걸릴걸?
지금 그만두고 싶다는 건 잠깐의 생각일 거야.
엄마는 일을 해야 돼.'
클럽에 가기 전 팩트를 두드리며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그녀가 용기 내어한 말을,
나는 파운데이션 퍼프로 찍어 눌러버리는 그런 무심한 딸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만둘 수 없었던 상황 덕에 엄마는 꾸역꾸역 정년을 다하고 코로나와 함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셨다.
엄마야 삶이 그녀에게 일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만 나는 뭘까.
나는 왜 그만두지 않았을까?
첫째, 솔직히 방학 때 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교사는 방학 때 쉬면 되지 않냐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반, 불평 반의 시선이 있다.
맞다.
방학 때 쉬면 되긴 한다.
연가나 휴직이 자유로운 직업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맞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계약직이어서 그 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초등은 모르겠다만 내가 있던 학교는 담임이 병원 침대에 누울 정도는 되어야 병가 휴직을 쓰는 분위기였다.
학기 중에는 보강이 어렵기 때문에 남들처럼 평일에 연차를 쓴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차에 치이거나 입원 또는 수술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정말 위급한 게 아니라면 방학 때 치료를 하는 분위기였다.
학기 중에 생기는 이벤트는 최소화하는 것이 양심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직업.
아파도 아플 수가 없었다.
학기 중에는 아이들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불사르고 방학엔 재가 되어 지냈다.
그리고 방학 때 누구보다 열심히 쉬었던 게 나였다.
방학식 날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원 없이 쉬었다.
학기 중에 못한 것도 마음껏, 여행도 마음껏, 늦잠도 마음껏, 체험단도 마음껏, 정말 원 없이 마음껏 살았다.
그렇게 하면 회복이 될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두려웠고 힘들었다.
열심히 하자던 내 다짐과는 다르게, 개학을 해도 내 마음은 그대로여서, 그냥 아픈 채로 쭉 학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방학 때 충분히 쉬어도 학기 내내 힘든 상황이 오게 됐다.
한 치 앞도 모르고 한 해 계약을 해 버렸던 22년의 12월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둘째, 알량한 책임감이 있었다.
아직 4월인데, ‘내가 그만두면 우리 애들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3월부터 내년 2월까지 계약을 해 버린 몸.
나는 그들의 하나뿐인 담임교사였다.
우울증이 처음 생겼던 첫 해의 아이들은 순하고 예뻤다.
우리 반 아이들도 순하고 예쁜데 수업을 들어가는 아이들까지 나를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어서 우울했지만 사랑을 듬뿍 받았던 해였다.
그 아이들을 버리고 학교를 떠난다니, 유기견처럼 남겨질 아이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도록 날 버티게 해 준 아이들, 곱고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이 아이들을 떠나고 갈 수 없다.
적어도 한 해는 버텨보고 그만두자.’
우울증이 나으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상반기 때 아파서 못다 한 것들을 보상이라도 해주고픈 마음에 2학기는 더욱! 열심히! 아이들의 행복에 집중했다.
작년 가을부터 마음이 나아지면서 나는 일에 대한 의욕이 다시 올라와 아이들과 핼러윈 파티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고 달마다 행사를 열었고 그걸 해 냈다.
의미가 있었다.
보람이 있었다.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니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그믐달 같던 내 마음이 보름달처럼 꽉 차서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
아이들에게 용기를 얻고 나는 호기롭게 다음 해도 계약을 했다.
그리고 수업도 안 듣고 인성도 바닥인 최악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셋째, 경제적인 문제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중에 퇴사를 하는 기간제 교사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사직을 생각하니 먼저 돈 문제부터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럼 2주마다 가는 내 정신과 진료비는?
다음 달 생활비는?
우리 남편과 고양이는?'
자발적으로 퇴사를 할 경우 실업급여는 당연히 받을 수 없다.
계약에 명시된 성과급이라든가 그동안 받아 온 복지 포인트, 명절 상여금, 온누리 상품권......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삶을 이어줬던 달콤한 것들부터 떠오른다.
정말 이 사람은 살고 싶은 건지 죽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올해 5월은 죽음과 사직의 기로에 서서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는데 슬프게도 일을 정말 그만두면 남편의 말대로 '답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을 수 있다면 당장 그만둬.
하지만 그만두고 나서 솔직히 답은 없잖아.
노숙자처럼 사는 거와 뭐가 다르겠어?'
MBTI 검사에서 순도 90% 이상의 T가 나오는 우리 남편의 T스러운 위로.
처음엔 그 말이 너무 서운해서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남편의 말대로 가계라는 기둥을 나와 남편이 떠받치고 있는데, 내가 무너지면 자연스레 우리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붕괴 직전인 건물을 보고 무너져내려간다고 호들갑을 떠는 남편에게 잘못은 없다.
우리의 소중한 가정을 와르르 맨션으로 만들 순 없어서 나는 마지막으로 기운을 쥐어짜 내보기로 했다.
슬프다, 죽기도 힘들고 살기도 힘들다.
그만두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서 힘들다.
일본 드라마 이름처럼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데, 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계약 종료일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다.
'일이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 않아요?'
'네, 일이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라는
명쾌한 답을 왜 나는 내리지 못했을까.
괴상한 오기가 생겼을 수도 있고, 계약이라는 최소한의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직을 한다고 내 삶에 갑자기 행복이 온다거나 우울증이 끝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항상 예측이 안 되는 게 삶이고 인생이다 보니 나도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길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덕분에 5월에는 가장 많은 약을 달고 살았지만 자살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회복이 된 덕에 가고 싶었던 홋카이도도 무사히 다녀왔다.
그리고 또 나아가나 싶어서 약을 줄였더니 증상이 심해져서 지금은 우울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11월까지 잘 지내고 있다.
용기가 부족한 나는 그래도 헤어질 결심은 생겨서 내년은 일을 쉬어 가기로 했다.
그 결정을 한 것만으로도 나에게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도망치지 않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