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고 싶어.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느냐?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겠다.
우울증 재발 후 치료를 한 지 5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다.
과거처럼 죽을 거다! 죽고 싶다! 는 아니지만 생을 마감하고 싶을 만큼의 우울은 늘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올해 5월은 정말 절망적인 달이어서 하루하루 눈을 뜨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니! 학교에 가서 또 고문을 당해야 한다니!!’
매일 죽지 않을 만큼 간을 쪼이고, 나을 만하면 다음날 다시 간을 쪼였다는 프로메테우스도 나만큼 괴로웠을까.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옷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데, 이렇게 사는 들 무슨 소용이 있나.
삶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한 편이어서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순전히 우울증 덕분이다.
죽어야 한다.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난다.로 내 아픈 두뇌가 끊임없이 죽음을 종용했다.
흔히 우울증 증상 중에 이러한 상황을 ‘반추사고’라고 하는데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학교에 가기 싫잖아.
내일 학교에 가지 않으려면
죽어야 학교에 그만 갈 수 있단다.
끊임없이 죽음을 머릿속에서 씹어댔다.
우울이라는 껌은 단물도 빠지지 않고 입 안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 죽을 거면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사 온 집이 12층에 있어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방법은 추락사였다.
베란다를 확장하여 터 놓은 집이라 침대에서 두 걸음만 걸어 나가면 베란다 창이 있었다.
그대로 그 난간 위에 서서 배를 난간에 받치고 철봉을 돌듯 떨어지는 그림을, 매일 아침 머릿속에 그렸다.
발로 딛고 떨어지기에는 난간이 너무 높았거든.
나는 문과여서 계산 따윈 할 줄 모른다.
떨어질 경우 목부터 떨어져서 목이 꺾어야 제대로 죽을 수 있을 거다.
잘못 떨어졌다간 척추부터 부러져서 영구 장애를 얻고 숨만 붙어 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죽다 살아나는 건 더 끔찍한 일이다.
아파트너에 죽은 나로 인해 집값이 떨어지겠다는 우려와 혹시나 언론에 실릴 내 이야기가 싫었다.
백세희 작가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면 나 같은 경우는 ‘죽고 싶지만 아무도 모르게 부담 없이 조용히 죽고 싶어’였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얌전히,
죽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주변에 자살을 한 사람이 두세 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은 흔한 방법 중 하나인 번개탄을 이용해서 죽었다고 들었다.
아, 이것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설프게 영구 장애를 얻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죽을 수 있는 공간은 남편의 자동차뿐인데 남편이 너무나 자동차를 아껴서 그 짓은 차마 못하겠더라.
한강에 뛰어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건 한강 구조대분들께 너무나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차나 도로에 뛰어드는 것도 운전자분에게 너무 죄송한 일.
죽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는 싫었다.
남은 건 동맥을 끊는 방법일 터.
동맥이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어서 깊게 칼을 박아서 끊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작년에 술을 잔뜩 마시고 비참한 기분이 들 때는 남편이 잠든 사이에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부엌칼의 감촉을 느끼다 잔 적도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요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사 왔던 칼 세트 중 하나였다.
술 때문에 열이 오른 볼에 차가운 칼날을 대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작년의 우울증 상태에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아마 그런 형태로도 죽고 싶은 만큼의 우울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맥박이 뛰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서 깊게 칼을 박고 끊어내면 되지 않을까, 피가 사방으로 튈 테니 화장실에서 해야겠지?’
그런 생각들을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다 보면 사방에 뿜어질 5리터의 피를 닦아야 하는 나의 남편이 불쌍해진다.
목을 매는 것도 마찬가지.
죽고 나면 근육이 풀리면서 체액이 모두 배출된다는데 방귀도 안 튼 남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엔 민망하다.
여하튼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는 나의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고 일이 많다.
게다가 물건은 또 왜 그렇게 많이 사 뒀는지.
2월에 산 면세품이 5월에 쓰지도 못한 채 쌓여있는 것을 보고, 나는 쓰지도 않을 화장품을 많이 산 나를 책망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쓰지도 못할 걸 왜 그리 사서 쟁여두었담!’
솔직히 아까웠다.
이건 쓰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8월에 <오펜하이머>가 개봉한다니 그것만 보고 죽을까?
11월에 <듄:파트 2>는 그래도 보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오빠는 식물을 잘 못 키우니까 얘네가 죽고 나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정말 하찮은 생각들이 하루하루를 살게 해 줬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내가 많이 나아졌기 때문에 그간의 일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시기이다.
우울증이 심할 때에는 이런 생각조차 사치이다.
뇌가 아파서 생각이 안 된다.
하루 종일 ‘죽는다, 아니 죽어야 한다.’만 머릿속에 맴도는 삶을 살았다.
면세품이 남았든 말든,
소중한 남편이 있든 말든,
귀여운 고양이가 있든 말든,
내가 키우는 식물이 죽어가든 말든.
우울증의 대모 여에스더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모든 좋은 것을 눈앞에 두어도 무감동한 병.
<토르 : 러브 앤 썬더>에서 딸을 잃고 색을 잃어가던 고르처럼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삭막해지던 병.
지금 생각해 보면 오로지 죽음만 생각하던, 그 끔찍한 무채색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는 것도 너무 어렵지만, 죽는 것도 꽤 힘들다.
혼자서 오롯이 삶을 일궈내는 것도 너무 어렵지만,
혼자서 조용히 삶을 정리하는 것도 정말 어렵다.
어렵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이 글을 읽다 보면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일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 거면 일을 그만두면 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