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젖어가던 지난봄의 이야기
3월까지는 그래도 힘을 내어가며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매일마다 아이들이 무의식에 뱉어내는 욕을 듣거나 수업 시간마다 화장실을 가는 건 뭐, 아무렇지도 않을 무렵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던 3월 말부터 학교폭력사안이 하루를 거르지 않은 채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퇴근을 하면 나의 일도 끝나야 하는데 사건은 일과 중에 터지고, 이에 대한 보고는 퇴근 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이 빠졌다.
아이들은 자신이 한 일은 쏙 빼놓고 상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했고 이 아이들의 부모도 누구 부모 아니랄까봐 아이를 변호하는데 급급했다.
이해는 간다.
나의 소중한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이라든가,
나의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든 보호하고 싶은 그 마음.
그런데 당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리거나 다른 아이의 옷을 벗겨서 끔찍한 기억을 만들었다면 그것에 대해 최소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겪었던 학부모들은 죄송합니다. 가 절대 먼저 나오지 않았다.
"우리 아이가요?!"가 먼저, "정확하게 알아보셨나요?"가 둘째.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하루들이 이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일매일 발생했다.
그 정점을 찍었던 건 아이들이 부딪히며 서로를 파악하기 시작하는 3월, 그리고 무르익는 4월, 수련회를 가는 5월, 그렇게 또 사이가 틀어지는 6-7월 등이 있다.
코로나가 끝나서 첫 수련회를 다녀왔는데 처음으로 버스 좌석을 부순 아이가 나왔다.
젖혀지지 않는 의자를 젖혀 보겠다고 아예 꺾어버렸는데 용접을 해야 고쳐진다고 기사님께서 난색을 표하셨다.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애들이 집중을 못해서 집중을 시키는 데만 하세월이었다.
단체로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비명과 욕설, 고성이 오가는 체육활동이었다.
그래도 놀기는 잘 놀더라.
그 꼴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우울증이 가장 극심할 때 수련회를 가 버려서 우울을 삼키며 지내야 했다.
사진을 몇 장 찍어주고는 나답지 않게 교사 숙소로 대피해서 집으로 가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쾌적하기 그지없던 수련회장의 티브이와 옷장, 거울, 신발장을 야무지게 부수고 아이들은 퇴소식을 마쳤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학년부에서는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수업을 당연히 듣지 않는 것은 그러려니라고 이해를 해도, 선량한 얼굴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성악설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른이 훈육을 위해 체벌을 하지 않으니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때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멱살을 잡아재끼는 아이들을 풀어헤쳐야 했고 그 저녁엔 보호자에게 상황을 알려야 했다.
상황을 알리는 거지 지도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나 상식이 없는 보호자가 많다고?
예전엔 별난 아이가 30명 중에 한 두 명 꼴이었다면 내가 체감하기로는 20명 중에 7-8명이 산만하거나, 우울하거나, 폭력적이어서 그 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그 아이들이 만들고 있다.
애써서 선량하게 자라 온 아이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꼈는데 이미 늦었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더라.
수업 시간의 45분 중 15분은 아이들을 가만히 앉히는 데에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
무릎이 정면을 향하게 바르게 앉는 것부터가 어려운 아이들.
코로나 시기 내내 누워서 수업을 들었을 테니 앉는 게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때가 많았다.
2학기 말이 된 지금쯤에서야 아이들은 이제 절반은 무릎이 정면이 향하도록 앉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거나 옆으로 앉아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그렇다.
교육이 아니라 생활 습관을 들이는 것부터 하려니 힘들다.
45분 수업이 아이들에겐 고문이다.
앉아 있지만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앉아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들, 교과서에다 알 수 없는 도형을 한없이 그려 나가는 아이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지쳐갔고 나에게 언성을 높이는 학부모가 두렵고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무해한 얼굴로 나에겐 인사를 건네고 친구들에게는 웃으면서 욕설을 나누는 저 괴이한 아이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참, 나는 참고로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라 중학교 교사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슬슬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작년처럼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아차 싶었는데 올해는 위산이 올라오면서 아예 먹을 수가 없게 되고 잠도 잘 수 없게 되었다.
쓰리고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고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눈을 뜰 바에는 눈을 감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처음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게 5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