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없는 강대리의 또 다른 Job
그날 점심시간, 우리가 앉은 자리에는 새로운 얼굴이 있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박주임. 인스타그램에 감성 글귀와 디저트 사진을 자주 올리는, 그야말로 요즘 MZ세대의 전형이었다.
“강대리님, 요즘 주식도 빠지고 부동산도 위험하던데, 아직도 ETF 자동매수 돌리세요?”
박주임이 웃으며 물었다.
“네. 멈추면 손실이 확정되잖아요.”
강대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근데 불안하지 않으세요? 지금은 그냥 현금 들고 있는 게 낫다는 사람도 많던데…”
“불안한 시기일수록 자동화된 구조가 있어야 해요. 감정에 따라 판단하면 결국 무너지거든요.”
나는 물끄러미 강대리를 바라봤다. 그는 단순히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들어오자마자 쓰는 방식이 구조화되어 있었다.
“월급 들어오면 자동이체만 다섯 가지예요. 보험료, 대출 상환, ETF 매수, 금 매수, 배당주 구매. 나가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어요.”
“그럼 여유 자금은 어떻게 써요?” 내가 물었다.
“없으면 안 써요. 있어도 쓸 이유가 있어야 써요.”
박주임이 웃었다.
“와, 저는 이번 달 월급 들어오자마자 제주도 비행기 끊었는데… 가을 제주 안 가면 후회하잖아요. 요즘은 삶의 질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는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저 요가도 다시 등록했어요. 이번엔 핫요가요. 땀 빼면 진짜 개운해서 삶이 좀 나아지는 느낌이거든요.”
강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럴 수 있죠. 다만 저는 삶의 질을 단기보단, 길게 봐요.”
“길게요?”
“지금 당장 즐거운 것보다, 미래에도 여유가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좋거든요. 지금은 절제하고, 그 여유를 나중에 크게 쓰고 싶어요.”
“근데 그렇게 살면… 너무 재미없지 않아요?”
강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죠. 근데 저는 지금도 꽤 재밌게 살고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그가 책상에 올려둔 태블릿 화면이 깜빡였고, 내가 무심코 힐끔 본 순간이었다.
“어? 이거… 소설이에요?”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네. 제가 쓰고 있는 중이에요. 밤에 조금씩요.”
“대박… 출판도 하셨어요?”
“네, 두 권 있어요. 필명으로 냈죠. 브런치에도 올리고 있고요. 광고 수익이 조금 나요.”
박주임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작가세요? 부동산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회사도 다니시고… 대체 시간이 몇 개세요?”
강대리는 미소 지었다.
“그냥 다 조금씩. 한꺼번에 하진 않아요. 글은 애기 재우고 밤에 조용할 때, 부동산은 주말에 발품 팔면서.”
나는 그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를 단일 수단으로 쓰지 않고, 수입원 자체를 분산시켜 리스크를 줄이고 있었다.
“강대리님, 그럼 월급이 없어도… 생활이 돼요?”
“지금 당장은 어렵겠죠. 하지만 언젠가 월급 없이 살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혹시… 유튜브도 하세요?” 박주임이 물었다.
“기획은 하고 있어요. 얼굴은 안 나오는 형식으로. 수익보단 기록용이지만, 그것도 언젠간 수단이 되겠죠.”
박주임은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저는… 회사 아니면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갑자기 불안해지네요.”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말이 뇌리를 때렸다.
회사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그랬다. 자격증, 토익, 인강… 전부 ‘회사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틀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블로그도 만들었다. 강대리처럼 멋진 글을 쓰진 못해도, 하루에 쓴 돈을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ETF를 샀다. 매달 만 원씩.
처음엔 보잘것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소비가 줄었다.
내가 번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대리는 말했다.
“수단은 하나가 아니에요. 오히려 회사 하나만 믿는 게 더 위험하죠.”
나는 묻고 싶었다.
“그런 걸 언제부터 준비하신 거예요?”
그는 생각에 잠기더니, 웃으며 말했다.
“스물다섯 때요. 애기 생기고, 내 삶을 내 마음대로 못하게 됐을 때. 그때 처음 알았어요. 삶은 외줄타기면 안 된다는 걸요.”
이후 2021년, 금리 인상과 시장 조정의 폭풍이 닥쳤다.
많은 사람들의 대출이 무겁게 눌리고, 주식 시장은 침잠했다.
강대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이럴 때가 와야죠. 자산은 늘 수만은 없어요. 줄 때도 있어요. 근데 흐름이 멈추지 않으면 다시 올라요.”
그의 자산은 줄어도,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삶의 수단’은 건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