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이유
그가 일을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마이너스 지옥이었다. 월세나 렌터카 할부금이 밀리기도 하고 다른 공과금이 밀리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뭘 밀려본 적이 없었는데 내 삶이 뒤로 더 후퇴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지만 한 사람 더 늘었다고 지출도 더 늘어났고, 그는 힘든 배송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씀씀이가 컸다. 그 부분을 지적해도 나아지지 않았고 통제되지 않았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에게 쓰는 돈이었기에 옷도 잘 안 사고 미용실도 안 가게 되고 커피 한 잔도 큰 마음을 먹어야 가능했다. 매달 그에게 얼마가 부족하다 얘기하는 것도 지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신용카드로 장기카드대출을 받아서 모자란 지출을 채웠다. 처음 시작이 어렵다고 했던가. 부족할 때마다 한두 번씩 카드대출을 받았더니 나중에는 갚아야 할 돈이 1000만 원 정도가 되었다.
교회에서 알게 된 동갑 친구가 있다. 처음에는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친해지게 되었다. 전화로 많은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우는 나와 함께 울어주던 고마운 친구다. 그 친구와 전화통화 중 다른 대출을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상황이 걱정이 되었는지 친구는 목사님께 나의 상황을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고 내 상황을 얘기하게 되었다. 기도해 보겠다고 하셨고 며칠 뒤에 목사님께서 사비 200만 원을 보내주셨다. 나에게 너무 큰돈이라 이걸 받아도 될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지만, 감사하게 받기로 했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되고, 아이는 다니던 어린이집을 쉬게 되어 집에 데리고 있게 되었다. 마침 다니던 교회는 주중에는 청소년 카페로 운영되고, 일요일에는 예배의 장소로 사용되는데 나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던 목사님께서 주중에 청소년 카페에서 오후 시간대 아르바이트를 해보는 건 어떠냐고 먼저 제안해 주셨다. 아이를 어린이집을 보내야 했다면 못했을 텐데, 집에 데리고 있을 때 이런 제안을 받으니 타이밍이 신기하기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하기로 했고 집에서 출발하면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가는 50여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아이가 4살이라 유모차를 가지고 다녔고 버스에 타려면 유모차 접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날이 맑으면 다행이지만 비가 오기라고 하면 아이 챙기랴 유모차 접으랴 짐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지하철에서 유모차에서 잠이 들면 지하철역에서 청소년카페까지 꽤 먼 거리를 유모차를 끌며 걸어가기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하며 일하는 것이 힘들기는 했지만 적게나마 돈을 고정적으로 벌 수 있었고, 나로서 살 수 있는 출발점이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일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데 이런 기회가 생겨 일을 하게 된 것도 감사했다. 나와 함께 해준 작지만 밝고 씩씩한 아이가 있어 힘이 되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을 하기에 힘들지 않냐며 목사님께서 집을 교회 근처로 옮기는 건 어떤지 물어보셨다. 보증금 1500만 원에 월세가 가능한 곳이 있다며 알려주셨고, 보증금이 500만 원 부족해서 갈 수 없었는데 시댁에 도와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시어머니가 펀드에 넣어둔 여유자금이 있다고 그에게 들었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시아버지 명의로 되어있던 땅이나 여러 재산들이 어머니 명의로 바뀌었다. 아들들도 상속할 수 있는데 시어머니가 아들들에게 명의를 시어머니에게 돌린다는 서류를 작성하게 했다.
시어머니께 출퇴근 문제로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하려고 하려고 하는데 보증금 문제가 있다고 상황을 설명해 드리니 생각해 보신다고 하셨다. 다행히 500만 원을 주시기로 했다. 이사를 갈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항상 변수는 존재했다. 시어머니와 그의 사이가 별로 좋지는 않아 주기로 하셨지만 받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시간만 흘렀다. 코로나 시국이 오래될수록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목사님이 봐주셨던 집이 보증금이 500만 원 더 올라서 2000만 원이 되었다. 시어머니께 그 상황을 말씀드리고 1000만 원을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그건 안된다고 딱 잘라서 말하셨다. 500만 원만 받았고 그 돈을 시어머니께 주시면서 “내가 내 아들은 못 믿어도 너는 믿는다.”라고 하셨고 나는 그 돈을 받으면서 그에게 500만 원 받았다는 얘기는 안 하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에게 500만 원이 생겼다고 하면 일을 안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증금이 500만 원이 모자란 상황에서 이사 문제는 표류 중이었다. 어느 날 교회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500만 원을 만들어서 빌려주고 싶다면서 그 문제로 자기 남편이랑 얘기를 해봤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친구지만 타인의 일을 어떻게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결혼생활이 너무 괴로웠지만, 이런 친구가 내 인생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차 올랐다.
'나 헛살지 않았네. 내 인생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나의 원칙에서 거액을 빌려주려고 하는 그 친구의 마음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나에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그 친구에게 나도 진심으로 대하고 싶다.
그 친구에게는,
"가능하다 해도 받을 수 없어.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라고 했다. 친구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고 혹여나 모를 돈문제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넌 평생친구다!
결국 교회 근처로 이사하는 건 없던 일이 되었다. 코로나가 점점 길어지면서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목사님도 급여를 못 받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내 급여를 주기에도 어려움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청소년카페 수익은 음료 재료비를 살 정도였기 때문에 카페는 교회 재정의 도움을 받고 있다. 교회 재정의 어려움을 모른척할 수 없었고 내 급여 나갈 일이라도 줄어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만둔다고 말씀드리고 6개월 정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마쳤다.
이 시절을 돌아보면, 그때의 힘든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주변에 있던 좋은 사람들 덕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