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_최최최종.jpg

최후통첩

by 히힛


그와 대화를 안 한 채로 몇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계속 일을 알아보며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야근을 하게 되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었고, 아이를 보냈던 유치원은 5시면 끝나고 친정도 멀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결과는 물론 떨어졌다. 회사입장에서는 변수가 많은 사람을 선호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씁쓸했다.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도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되니 답답했다.


아이의 심리상태를 알고 싶어서 아이를 데리고 아동발달센터에 갔다. 상담은 1회만 진행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이와 나의 놀이하는 모습, 그다음 치료사님이 아이와 함께 놀이를 하며 아이를 파악했다. 아이는 긴장이 높은 상태라고 했다. 불안하고 과민한 상태라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과격하게 반응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긴장을 줄이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현재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니 아이가 있었던 환경치고는 눈 맞춤도 잘되고 양호한 편이라고 했다. "어머님이 노력을 많이 하셨을 거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의 수고를 알아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가장 고민됐던 질문을 치료사님께 했다. 폭력적인 아빠라도 있는 게 나은건지, 아니면 이런 환경에서 분리되는 게 맞는 건지, 아빠의 부재가 아이에게 영향은 없을지.


상담사님은 몇 초간 생각하더니, "아이가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라서 아빠의 부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게 되면 괜찮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 말에 울컥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이지만, 전문가의 확인도 받고 싶었다. 내가 하려는 이 선택이 정말 맞는 건지. 나의 결심은 더 확고해졌다.

나도, 아이도, 지켜야겠다.


애플펜슬 사건 이후로 나의 상황을 정리하고 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재정적인 문제]

세금 떼고 당신의 한 달 급여가 250만 원 정도인데 지출은 450만 원 정도야. 고정비만 300만 원이 넘어. 매달 200만 원이 부족한 상황인데, 이걸 매달 내 신용카드 카드론으로 200만 원씩 메꾸면 내가 갚을 수 없을 빚을 계속 만들게 돼.(이때 거의 천만 원 정도 빚이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빚은 절대 안 되다. 나랑 아이는 친정으로 가고 난 일을 할 거야. 내 명의로 되어있는 것들은 내가 알아서 낼 테니까(신용카드빚, 아이보험, 내 보험 등) 당신 명의로 되어있는 것들은 당신이 내.(신용회복위원회, 우체국보험 담보 대출금 등)
★단 예외로 아이 양육비 30만 원, 신용카드 할부(아이패드, 애플워치) 9만 원은 매달 보내주길.


[가정폭력 문제]

부부상담 받아. 이 마지막 제안도 거절하면 이혼해. 시간, 비용 탓 다 핑계야. 화가 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고서는(어린 시절 상처) 반드시 재발한다고 생각해. 언제 일어나지 모르는 시간문제일 뿐이야. 11년 동안 결혼생활을 해보고 내린 나의 결론. 어떤 이유로 갑자기 화남 - 분노 치솟음 - 언어폭력, 감정폭력, 물리적 폭력 - 죄책감 - 한동안 잠잠... 이 패턴의 반복.
화가 조절이 안되면 치료를 받아야지... 배워야지... 어떻게든 고치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지. 폭력은 범죄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내가 신고해서 너무 충격이고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당신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폭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어. 지금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지 않을 거야.
Q. 아이가 결혼해서 남편한테 어떤 이유에서건 가정폭력 당하고 있다고 하면 그냥 살라고 할 수 있어?


[아이 정서적 문제]

유치원에서 발생되는 문제와 자라면서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게 걱정돼서 상담센터에 갔었는데, 아이는 긴장이 높은 상태라고 해. 불안하고 과민한 상태라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과격하게 반응하게 된다고. 그래서 긴장을 줄이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어. 그러려면 가정에서 아주 기본적으로 폭력은 없어야지. 그래서 더 같이 살 수 없다는 결론이야.

당신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여자와 헤어질 기회가 왔으니 기뻐하리라 생각함. 본인이 원하는 깨끗한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길.



그는 그 이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유치원을 하원했고 초여름 기온에 집에 있어도 더웠다. 선풍기를 켰지만 그래도 더워서 그 해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었다. 그는 방 안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나와서는 에어컨 아래쪽 먼지도 안 닦고 에어컨을 튼다고 짜증을 내더니 에어컨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기분이 나빠져서 방으로 들어가 말로 하면 되지 왜 에어컨을 끄냐고 화를 냈고, 그와의 감정싸움이 시작됐다. 감정이 상한 상태로 서로 이혼하자며 이혼얘기가 오가고, 그는 또 나에게 욕이라는 언어폭력을 써댔다. 씨**, 개***. 예전에도 그에게 욕을 듣고 같이 욕을 해주지 못한 것이 분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같이 씨***라고 욕을 하고 아이가 있는 작은 거실로 나왔다. 시원하면서도 또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스쳤다. 거실에 있는 아이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그대로 들었을 걸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해졌다.


아이의 앞에 앉아서 괜찮냐고 다독이고 있는데 그가 방에서 다시 나와서는 내 머리 정수리 부분을 손으로 쥐어뜯더니 천사코스프레 한다며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몇 개월 전 경찰이 왔을 때 앞으로는 폭력을 안 쓰겠다고 하더니 그 말을 스스로 어기는 걸 보면서 ‘혹시라도 그가 정말 폭력적인 걸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을 확실히 접을 수 있었다. 정말 조절이 안되는구나.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병이다 싶었다. 고쳐지기 어렵겠구나. 인정했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고 현관에 있는 중에도 막말을 쏟아냈고 나는 그에게 경찰에 신고 또 할 거라고 말을 했다. 그가 나간 뒤 실제로 경찰에 다시 신고를 할지 고민했고 이번에 신고하면 그를 고소하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할 것 같아서, 고소를 하는 그 상황을 맞닥뜨리는 게 두려워서 결국 신고는 하지 않았다.


헤어질 결심을 최최최종하게 된 날이다.

keyword
이전 19화그날, 112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