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세 마리의 곰돌이 같은 남자들이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면 성인 같았으나,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졸업생들이었다. "누구냐?" 하니 뒤돌아보는 아이들은 역시나 고2인 졸업생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니 아이들의 얼굴은 많이 지쳐 보였다.
이번주 고전 인문학 강의 도서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인데 연휴로 인해 게으름 피우다 부랴부랴 PPT를 만들던 중이었다. 내용을 인용하여 발문을 내며 책을 분석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나의 고도와 삶의 방향과 욕망, 지금 뚜벅뚜벅 걷고 있는 곳이 어딘지 삶을 분석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무척이나 무거운 신을 신고 걸어가고 있다. 마치 운동선수들처럼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묶고 뛰는 기분이다. 삶의 무게가 순간 나를 덮치기도 하며 힘겨운 순간도 있다. 현재 나의 고도가 어딘지, 나는 누군지, 무얼 기다리고 있는지 등 잘 분별하여 분명하게 알고 부단히 이겨내야 했다.
곰 같은 제자들이 변성기 다 지난 두툼한 목소리로 "선생님 보고 싶어 왔어요." 하며 자신들의 성적과 학교생활 등에 대해 종알거렸다. 그래도 옛 선생님이라고 오랜만인데도 숨김없이 마음을 보여주어 고마웠다. 고 2 중반인 아이들에게 나는 "요새 많이 지치지? 원래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 까지가 시간도 안 가고 제일 지칠 때란다."라고 하니 한 아이가 "이미 지쳤어요." 한다.
아이가 얼굴색도 안 좋고 표정도 어두워 보여 어떤지 물으니 우울증이라 1년째 약을 먹고 있고, 그럼에도 요새 마음이 많이 힘들다고 했다. 옆에 전부 1등급인 서울대가 목표인 친구를 가리키며 그 아이의 인생이 자신의 꿈이라 말하며 웃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이 아이를 향해 "너의 고도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달려가고 있는 거니?"라고 물었다. 그리고 잠시 아이들에게 위로가 될 말들을 건넸다. 평소 책을 잘 읽는 아이들인지라 알아듣고는 숙연해졌다.
"좋은 학벌을 갖는 거 중요하지. 앞으로 가끔씩 이 학벌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단다. 그런데 주로 학벌은 생활에 필요하지 않지. 이 가끔 필요한 일을 위해 네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지 마라. 네 고도는 네가 만드는 거니까."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는 잠시지만 이야기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거나 편안해했고 나는 세상에서 네 마음의 상태가 가장 소중한 거라고 조언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머물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에게 했던 말들이 곧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임을 알았다. 지금 내 속이 뒤집어지고 있는 이유를 살피고, 가끔 힘든 이 시기를 잘 극복하는 방법 또한 모르는 것 같으나, 내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렵지만 그 고도를 찾아 인내하며 기다리면 무언가 오겠지.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