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남다른 것이 모두 내 탓일까 봐 불안했다
유난히 말이 늦은 아이였다.
첫 말문을 튼 곳은 시댁에 대식구가 모였던 추석명절이었다.
생후 9개월밖에 안된 쌍둥이 사촌들은 덩치가 내 아이의 절반밖에 안됐지만 겨우 일어설까 말까 하면서도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기운차게 ‘엄마’를 외쳤다. 소란스럽게 에워싼 사람들 사이에서 할머니가 말을 잘 하는 사촌들을 칭찬하면서 내 아이를 나무랐다.
두 살 난 아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침울해지더니 화난 표정으로 ‘엄마’를 외쳤다.
난생처음으로 말을 한 아이를 안아 들면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만 20개월이 된 아이도 뿌듯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두돐이 될 때까지도 아이가 말한 단어는 손가락에 꼽았다.
잘 먹이고 입히기만 하면 보채는 일이라곤 없는 키우기 수월한 아기였다. 하루에도 몸이 쑥쑥 자라는 유아기에도 말이 늘지 않아서 나는 걱정이 늘어갔다.
잘 먹이고 안아주기만 하면 방글거리며 웃었지만 주위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걱정이었다.
주위에 상의해보고 수소문 끝에 언어치료를 시작했다.
남편은 좀 느긋하게 기다려주면 알아서 말이 트일 텐데 내가 너무 극성을 부린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는 나대로 언어발달 지연이 심한 아이는 자폐증이나 지적장애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졌다.
주위에서 또래 아이들이 조잘조잘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의 말문이 언제 터질까 노심초사하기만 했다. 세돌이 지나면 아이들 거의가 말문이 터진다지만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으로 가리키거나 잡아끌기만 했다.
하루는 감기에 걸린 아이를 데리고 동네 소아과를 찾아갔는데, 의사는 진료를 거부하고 떼를 쓰는 아이가 자폐증일 수도 있다며 대학병원 진료를 권했다.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막연히 두려워했었던 것이 드디어 왔구나, 생각했던 것도 같다. 덜덜 떨면서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에 예약을 하고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서 아이를 보면서 진료일만 기다렸다.
대학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 손을 잡은 채로 복잡한 수납절차를 거쳐서 소아정신과 표지판을 찾으면서 얼마나 많은 불안에 떨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달래면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만난 노교수는 아이와 눈 맞춤을 시도하며 ‘안녕’하고 인사했다. 아이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의사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는지 활기차게 ‘안녕’하고 외쳤다. 의사는 아이에게 몇 마디 더 말을 걸어보더니 나와 남편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아이는 평소 어떻게 키우는지 물었다.
내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서 대학병원 소아정신과를 찾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가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아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되도록 이성적이고 차분한 태도로 나는 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남편은 회사원이었고 나는 몇 달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중이었다. 조부모가 돌봐줄 형편이 안되었고 야근이 많은 직장생활을 하느라 부득이 갓난아기 때부터 남의 손에 맡겨 키우다가 두돐이 지나고는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다고. 교수는 지긋이 나를 보면서 얼굴을 찌푸리더니 엄마가 아이에게 차갑고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아이가 언어발달지연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자폐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직접 말을 가르쳐야지 언어치료를 받아서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며 나무랐다.
아이가 자폐가 아니라는 의사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이 캄캄했다.
내가 잘못해서 아이의 말이 느리다는데,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가 없었다.
나라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는데.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는데.
프리랜서로 일하느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아이의 말이 늦어서 걱정하고, 언어치료 수업을 알아봐서 데려가고, 틈만 나면 주위의 풀과 나무와 꽃을 가리키면서 아이에게 설명하거나 카드를 보여주면서 말을 가르치려고 애썼는데. 내가 차가운 엄마라서 아이의 발달이 느리다니, 자폐증이라는 의심을 샀다니, 모든 게 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고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나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되도록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천성이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힘든 시간이었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지만 아이의 발달은 여전히 또래에 비해 상당히 뒤처졌다.
그 무렵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는 목욕을 시키거나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아이의 쇄골과 배 사이에 계란 하나가 쏙 들어갈 만큼 오목한 부분이 있는 것을 어루만지며 귀여워했다. 아이의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웠고 자그마한 젖꼭지 사이에 둥근 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자라면서 오목한 부분은 더 커졌고 개구리처럼 배가 볼록해졌다. 아이는 갈비뼈의 양 끝이 안쪽으로 휘어지는 선천성 오목가슴이었다.
그 분야에서 유명한 흉부외과 의사를 수소문해서 진료를 받았다. 그는 만 4세에 갈비뼈를 펴는 금속 교정 바를 몸속에 삽입하여 2년 후 제거하는 것이 예후가 가장 좋다고 설명했다.
오목가슴 교정 수술을 받는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이전에 교정 수술을 마칠 수 있도록 만 4세에 수술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 권하는 대로 수술 예약을 잡았다. 내가 부족해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 해주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만 4세에 전신마취를 하고 몸속에 금속 바를 넣는 시련을 겪은 아이는 수술이 끝나고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아이의 부드러운 몸에는 열이 올랐다.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에는 진물이 흘렀다.
의사는 원인을 알 수가 없다며 갖은 항생제를 처방했다. 아이는 화장실에 갈 때도 독한 항생제 링거를 달고 움직여야 했다. 나는 날마다 수술 상처가 아파서 우는 아이를 꽉 붙잡고 상처에 드레싱 처치를 받게 해야만 했다. 열이 오르는 밤이면 숟가락에 시럽과 가루약을 탄 독한 해열제를 아이에게 먹였다. 고열에 시달리던 아이는 기진맥진해서 내 품에 안긴 채로 잠들었다.
오목가슴 교정 수술을 받고 나서 한 달, 그리고 2년 후 바 제거 수술을 받은 후 한 달 동안 아이는 병원에 입원해서 고생해야 했다. 오목가슴은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있는 질병이 아니었는데 모든 게 아이를 중심으로 사고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아이를 위한다면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였을텐데, 나는 아이가 남들처럼 자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고 그림을 그리게 했을만큼 절박했다.
아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린 것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아이는 숫자 2를 그린 후에 아래쪽에 선을 그어서 오리를 그렸다. 밝은 색깔의 크레파스를 사용해서 물고기나 오징어도 그려 넣은 후에는 꼭 웃는 눈을 그려 넣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고 칭찬을 기대하면서 함빡 웃었다. 잘 웃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해맑고 고운 아이의 얼굴에는 한 점 티 없는 사랑과 행복이 넘친다. 나는 그 아이가 우울한 나와 달리 긍정적인 자아상을 타고난 밝은 성품의 아이라고 믿었다.
지금에 와서 그 아이의 사진을 뒤적여보면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1학년까지도 밝고 해맑았던 아이의 얼굴은 키가 훌쩍 자란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어두워진 과정이 뚜렷이 눈에 보인다. 나는 사춘기가 되고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아이들이 말수가 줄어들고 우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겼는데, 어리석은 내가 몰랐던 사이에 내 아이는 혼자 우울증을 앓았었나 보았다.
사진관에서 찍었던 고등학교 제출용 증명사진 속의 미소년은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슬픈 표정이다. 그 사진이 아이의 영정사진이 돼버린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