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들처럼 Oct 24. 2021

14. 아이가 잠든 곳에 갈 때마다

슬픔은 계속되었지만 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2주에 한번 정도 아이를 수목장 한 곳에 찾아갔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 있는 농막은 숙소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차로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당일로 다녀오면 그날은 몸과 마음이 힘들었기 때문에 삼우제를 지낼 때까지 첫 삼일은 근처에 머무르며 매일 찾아갔다. 정처 없이 호텔을 떠돌아다니던 그다음 주에도 찾아갔다. 그러다가 단기 임대숙소에 정착한 후에는 이사와 짐 정리 그리고 남편이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격주에 한 번씩 찾아갔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날짜 감각도 없었기 때문에 양평에 가는 일정도 유동적이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었지만 매일 절에 가서 아이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막연히 49일을 애도의 기간으로 정했고 앞날에 대한 생각은 그 이후로 미뤘다. 

아이의 물건은 조금씩 정리해두었다가 49일째 되는 날 양평의 농막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49일이 가까워지자 가끔씩 찾아가는 황폐한 농막에 아이의 물건을 갖다 둔다는 게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아이가 짧은 생에서 분신처럼 아꼈던 노트북은 아이의 뼛가루를 뿌리던 날 농막에 두고 왔다. 

결국 49일째 되던 날 나는 아직도 새것인 아이의 고등학교 교복과 새 운동화, 책가방, 스카우트 제복과 액세서리 몇 가지만 추려서 농막으로 보냈다. 

49일째 되던 날 나는 농막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오랜만에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한참 울었다. 

고교 입학을 앞두고 찍은 사진 속에서 아이는 내 기억보다 많이 자라 있었다. 

실제로 키가 175센티미터로 훌쩍 자라서 살짝 청년 티가 나기 시작했었다. 두툼한 모직 재질의 진회색 교복 재킷과 청색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가 잘 어울려서 첩보영화에 나오는 꽃미남 요원처럼 멋졌다. 

49일이 지나 봤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이의 물건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애초부터 아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기는 불가능했다.


봄이 지나가고 초여름의 무더위가 찾아왔던 그 무렵에는 충격적인 기억의 재현이나 격렬한 슬픔이 잦아든 대신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나는 손으로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책장을 넘기면서 글자를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자 일기장을 손에서 놓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계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 내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현실감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매일 하루에도 서너 시간씩 일기를 썼다. 그러다가 아이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기 전에 서둘러서 글로 써서 남기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최악의 엄마였고 누군가 나를 동정하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열일곱 살에 세상을 저버린 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 아이였는지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능한 한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 아이에게는 자폐증이 있었다. 

나는 엄마임에도 그 아이가 타고난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싸주지 못했다. 

아이가 가정에서 위로와 지지를 받으면서 자라나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키워나가야 했는데 그럴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나는 내 아이가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했다. 

아이가 남의 눈에 정상으로 보이기만 바랬다. 위태위태하게 줄타기하듯 짧은 생을 살았던 아이는 결국 스스로 베란다를 타 넘어 추락하는 길을 선택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진실을 전하고 싶었다.


아이와 이별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노트에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던 아이의 마지막 잔상이 서서히 흑백 필름으로 변해가던 시기였다. 

또한 아침에 잠이 깨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도 차츰 내가 왜 낯선 곳에 누워있나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 

잠이 들었을 때마저도 나는 아이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울지 않고 지나가는 날도 가끔씩은 있었다. 

마냥 넋 놓고 반송장으로 지내면서도 산 육신은 먹고 씻고 자야 했다. 살아있어야만 한다면, 살아있는 한 내 아이를 기억하고 싶었다. 다른 일로 몸과 마음을 바쁘게 만들어서 내 아이에 대한 기억을 묻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내 아이가 어떤 아이였는지,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아이의 엄마인 내가 어쩌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지 망각하지 않고 깨어있어야 했다. 

나는 정식으로 출판할 수 없더라도, 그리고 비난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아이와 나에 대한 책을 쓰는 것으로 아이를 애도하고 싶었다.

아이가 나를 원망하더라도 슬픔에 가득 차서 글을 쓰는 모습은 용서해줄 거라고 믿었다. 


아이의 물건들은 마음이 내킬 때 차차 정리하기로 했다. 

잡풀이 우거진 농막의 황폐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꽃을 심거나 과일나무 묘목과 텃밭을 가꿔야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슬픔은 계속되었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이전 13화 13. 남은 날의 모든 아침이 오늘과 같더라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