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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들처럼 Oct 24. 2021

16. 스노우 화이트 랩톱

열일곱 해의 짧디 짧은 생에서 내 아이가 가장 아꼈던 물건은 노트북이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자기 노트북을 갖게 되자 무척이나 기뻐했다. 

저사양의 저가형 노트북이었지만 얇고 가벼웠고 디자인이 예뻤다.      


하지만 아이는 살아생전 자신의 노트북을 실컷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노트북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맞벌이를 하느라 남의 손에 아이를 맡겨 키웠고, TV 노출이 과도해서 아이가 발달이 늦고 자폐 증세를 보인다는 자책감이 컸다. TV를 틀어놓으면 아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의 스마트폰을 처음 만져본 일곱 살 무렵에는 앵그리버드 게임에 열광했다. 

미디어 자극이나 인터넷 게임 때문에 아이의 정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부모교육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게임을 하면 뇌에 단순한 자극만 전달되므로 충동성을 관장하는 대뇌변연계를 활성화하고 사고력과 이성적인 판단력을 관장하는 전두엽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인터넷 사용에 대해 극도로 예민했지만 점점 더 생활 속 깊이 침투해오는 인터넷 미디어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훗날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실시되고 학교 수업이 온라인 비대면 수업으로 대체되면서 아이의 인터넷 몰입은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컴퓨터는 아이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훗날 나를 가장 큰 비탄과 끝도 없는 후회의 바다에 빠뜨렸던 부분이 인터넷 사용이었지만 노트북과 인터넷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만 미쳤던 것은 아니다. 

아이는 단순히 게임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는 블록 코딩에 대한 학습만화를 본 이후로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에 흥미를 가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스로 몰입하면서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던 유일한 분야였다. 

대체로 멍한 아이가 금세 싫증 내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유아기부터 언어를 비롯한 모든 발달이 느렸던 아이에게서 처음 보는 타고난 재능이었다.  나와 남편은 컴퓨터 프로 그래밍에 문외한이었고 아이가 새로운 지식을 섭렵할 수 있도록 격려할 뿐 그것으로 소통하기는 불가능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연습하다가 언제든지 게임이나 유튜브 동영상으로 빠질 위험이 있었다. 

나는 되도록 컴퓨터 게임이나 유튜브 동영상 시청을 제한하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절대적인 학습량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마인크래프트로 배우는 파이썬 프로그래밍’이라는 책을 구입해준 후에는 마인크래프트 게임의 정식 소프트웨어를 구입하여 깔아주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아이는 여덟 학기 동안 카이스트 사이버 영재 과정을 수강했다. 

별도의 강의 없이 E북으로 학습하고 질의응답을 통해서 C언어 1,2,3과 파이썬 1,2,3 과정을 수료했다. 한 학기에 8회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라 중도탈락자가 많았지만 나의 적극적인 격려와 학습관리에 아이는 잘 따라주었다. 따로 배운 적이 없는 프로그래밍 문제를 E북 학습만으로 해내야 했지만 모르는 부분에 대한 질문을 게시판에 올리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방법을 찾기도 하면서 아이는 꾸준히 과제를 해냈다. B학점 이상 성적우수자로 방학마다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진행되는 캠프에 참여할 기회도 여러 번 얻었다. 

처음에 나는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나와 떨어져서 2박 3일간의 강의와 팀 프로젝트 수행, 기숙사 생활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카이스트 캠프 주최 측에 문의한 결과 따듯한 관심과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이는 캠프에 참여해서 즐겁고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낸 후 자부심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의 진로와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욕심에 눈이 멀었던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비난받아 마땅한 엄마였다. 


첫 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원서를 써야 하는 중학교 3학년 7~8월에 시작되었다. 

일반고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12월에야 고등학교 원서를 쓰지만 특성화고는 그보다 빨리 원서를 받는다. 또한 특수교육대상자의 경우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고교 입학 원서를 제출해야 한다.

나의 경우 이 시기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아이는 컴퓨터 관련 특성화고에 가고 싶어 했지만 평판이 좋은 학교들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거나 타 지역이었고 특수반이 없었다. 중학교 생활을 통해 아이가 일반반에서 통합수업을 받더라도 학교생활에서 갈등이 발생할 경우 중재해줄 특수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터라 특수반이 없는 학교로 보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집을 떠나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특성화고에 대해 잘 몰랐기에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할 수도 있는데 전학을 갈 수도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특수반이 있는 일반고 3개교와 컴퓨터 관련학과가 있는 특성화고 2개교를 찾아가서 진학상담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공립 특성화고 2곳에는 특수반이 있었다. 

단점은 학생 선호도가 높지 않아서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었고, 장점은 내신성적을 받는데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수반 교사들은 대학 진학보다는 장애인 취업을 권했다. 자폐증이 있는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폭넓은 사고력과 상황판단이 필요한 대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낼 가능성이 희박하며 화이트칼라 직종의 취업은 더욱 어렵다는 이유였다. 특수교사들은 나름대로 열의를 가지고 나에게 현실을 자각하고 아이의 현재 수준에 적합한 장애인 취업을 목표로 하라고 충고했다. 정신장애가 있는 아이들 중에서는 지능이 높고 행동이 정상에 가까웠으므로 일자리를 얻는데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현실은 아름답지 않았다. 

장애인 작업장은 정상인 매니저이 지시와 감독을 받으며 단순노동을 해야 했다. 아이가 꿈꿔온 프로그래머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결국 나는 아이를 일반고에 진학시키기로 결정했다. 대학 졸업 후에 취업을 못하더라도, 대학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더라도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여느 평범한 아이들처럼 내 아이에게도 대학생활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교생활의 목표를 컴퓨터공학과 대학 진학으로 정했다. 

아이도 나도 비장한 결심을 했다. 입시는 누구에게나 힘든 과정이고 인생에서 고교 3년간은 공부에 몰두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것은 나의 크나큰 과오이자 터무니없는 자만이었다. 

아이가 한순간에 떠난 후 나는 이때의 결정을 남은 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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