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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들처럼 Oct 24. 2021

18. 진로진학지도

정신장애가 있는 학생은 미래에 대해 꿈꿀 수 없는가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덮친 특별한 해였다. 

정부에서는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기를 권고했다. 집 밖에 나올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가급적 외부인과 대화를 삼가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온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전염성과 치사율이 높은 질병으로 인해 학교는 개학이 몇 번이나 연기되었다.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던 해였다.     


나와 아이는 낙담했지만 학원에 의지하지 않는 가정학습에 워낙 익숙했던 터라 그럭저럭 적응해나갔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던 보이스카우트 대집회가 연이어 취소되고 캠핑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없는 아이는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정 갑갑한 날이면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 호수공원이나 남산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전시관이나 도서관은 모두 폐쇄 중이었고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벤치에서 마시거나 음식점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그때마다 무척 즐거워했다. 

코로나 이후 첫 학기는 거의 등교하지 않았다. 시험 범위를 자체적으로 공부한 후 기말고사만 학교에서 치르고 끝이 났다. 

문제는 고교진학과 관련된 고민이었다. 먼 훗날의 일이라고 미루어왔던 결정을 본격적으로 해야하는 순간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아이가 기말고사를 치르던 날, 나는 교육청 특수지원센터에서 주관한 특수교육대상자 고교 진학설명회에 참석했다. 강의를 맡은 특수교사는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설명에 임했다. 

막연히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날 큰 충격을 받았다.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고등학교 생활은 의무교육인 중학교와는 달랐다. 특히 특수교육대상자인 장애인 학생들에게 고교 3년은 사회에 나가기 전에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기간동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만반의 대비를 해놓아야 한다고 했다. 

진학설명회 강사는 고등학교 특수반에서 이뤄지는 직업교육과 고교 졸업 후 1~2년간 더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특수교육대상자 전공과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구직활동에 대한 안내도 해주었다. 만 16세 이상 장애인은 주민센터 장애인 취업지원 서비스에 등록해놓으면 장애인 고용공단과 지자체, 기업체에서 의뢰하는 일자리 정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쏟아지는 정보에 혼란스러웠지만 다음 달에는 고교 입학원서를 제출해야 했다. 12월에야 일반고에 원서를 내는 일반학생들과 달리 특수교육대상자는 교육청에서 선 배치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40여 일 동안 나는 대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아이는 컴퓨터 관련 특성화고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특성화고는 얼마 없었다. 안산 소재 디지털미디어고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으며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진학한다는 소문이었다. 서울 소재 선린 인터넷고나 한세 정보고에는 특수반과 특수교사가 없었다. 

중학교 1, 2학년을 지나면서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또래 아이들과 갈등이 있을 경우 자신의 의도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상황을 중재해줄 수 있는 특수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했었다. 특수반이 없는 고교로 진학하는 모험은 할 수 없었다. 특성화고 진학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가야 할지 확신도 부족했다.  IT 열풍으로 인해 컴퓨터 관련 특성화고의 커트라인은 상당히 높아졌다는 소문이었다. 상위권 아이들과 경쟁하면서 고교생활을 제대로 해낼지도 걱정이었다.     

나는 집에서 통학가능한 거리에 있고 특수반이 있는 고교로 범위를 좁혀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 방문을 꺼리는 분위기였지만 일반고 3곳과 특성화고 2곳에 전화를 걸어 특수반 교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특성화고 전기전자과에 원서를 내려고 했다. IT계열 전공과가 있는 데다가 특수교육대상자 진학설명회에서 강의를 했던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였다. 성적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분위기나 차로 15분의 통학거리도 장점이었다.      

하지만 조언을 구했던 지인들의 의견이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하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는 특성화고의 수업 분위기는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엉망이기 일쑤이고 반항적이거나 겉멋 들린 아이들에게 휩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도 전학을 갈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IT계열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 또한 의대 다음이라는 SW 관련학과의 인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으리라고들 했다. 그러다가 장애인 전형으로 입시를 준비한다면 일반고에서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말에 마음이 쏠렸다.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아이를 일반고 특수반에 진학시키기로 결정했다.     

나는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한달 사이에 체중이 사오 킬로그램이 줄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겪을 어려움을 생각할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자기 방에서 숨죽여 지내던 내 아이도 내가 우는 기척을 느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아이의 마음고생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그 어린 아이가 가슴에 멍이 들도록 성적에 대해 고민하고 장애인으로 사회에 진출하거나 대학 진학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할 미래를 걱정했을 것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3학년 2학기가 되어서도 코로나19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1학기 때는 접속이 제대로 되지 않던 온라인 클래스가 서서히 제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으로 전달사항이 내려오고 출결은 시간표에 따라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고 과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이뤄졌다. 실시간 비대면 동영상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교사는 아직 소수였으므로 두세 과목을 제외하고는 교육용 동영상을 시청하고 시청소감을 작성하거나 학습과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업을 받지 못하더라도 제시문만 읽어보면 풀 수 있는 간단한 학습퀴즈 형태의 과제였다. 

아이는 노트북과 휴대폰을 사용해야 하는 온라인 클래스 시간 동안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고 싶은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나에게도 이전까지 짊어졌던 부담에 더하여 온라인 클래스에 빠짐없이 참여했는지 확인하고 게임이나 동영상 시청으로 빠지지 않도록 매일 감시해야 하는 업무가 가중되었다. 주의집중력이 부족했던 아이는 인터넷 게임과 동영상의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아이는 수업 과제 미제출로 2회의 결과 통보를 받았다. 다른 일로 바빠서 내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단 하루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한 과목은 휴대폰으로 과제를 캡처해놓았던 화면이 있어서 출석이 인정되었으나 다른 한 과목은 가차없이 결과처리되었다. 학부모인 내가 수업 동영상을 함께 보았고 수업 과제였던 감상 소감나누기도 함께 했다고 소명했지만 학교 원칙에 따라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아이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는 전 학년 개근이었으나 1과목 결과가 기록되었다. 


인터넷 게임과 유튜브 시청을 통제하는 나와 아이 간의 갈등은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로 시한폭탄처럼 누적되어갔다. 

나의 일상적인 잔소리나 나무람은 가끔 폭발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면서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아이가 해야 할 일을 잊고 게임을 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자유롭게 독립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감시와 통제 속에서 장애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꾸짖었다. 돌이켜보면 선을 넘은 비난이자 협박이었다.

그때는 그저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잠시만 눈을 떼도 어린아이처럼 게임에 빠지는 아이가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까 봐 하루에도 서너번씩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감에 빠졌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나 불만이나 반항을 세세하게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도 가끔씩 폭발했다. 게임을 하도록 허용한 시간이 끝나서 그만두어야 할 때도 아이는 가끔은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머리를 벽에 부 딛는 시늉을 했다. 나보다 덩치가 커진 소년이 흥분하자 아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나는 큰소리를 내고 때로는 손바닥을 때렸다. 극도로 화가나면 아이에게 집 앞 배드민턴장을 열 바퀴 달리고 오라는 체벌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므로 건강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달리기를 싫어했다. 집 밖으로 쫓겨나서 벌을 받아야 하는 아이의 분노나 서러움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고서도 엄마에게 맞은 손바닥이 얼마나 아프고 서러웠을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장애인 보호시설로 가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두렵고 상처가 되었을지 그때는 몰랐다.  


아이가 떠난 지 두 달이 된 지금 나는 밤에 잠들 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그리고 하루 중에도 시시때때로 베란다를 넘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죄어들고 나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울 수가 없다. 

나는 아이가 뛰어내리기 직전까지 아이를 나무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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