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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들처럼 Oct 24. 2021

7. 절 마당에 내걸린 하얀 연등

나에게 남은 유일한 일상은 내 아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일이었다

단기 임대숙소를 알아보러 가는 길에 심학산 약천사에 들렀다. 중생이 고통받는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 완만한 산비탈을 올라가면 대웅전과 요사채, 지장전이 ㄱ자 모양으로 배치된 절이 나왔고 그 뒤로 난 등산로를 한 시간쯤 올라가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나왔다.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일 무렵 가끔 등산을 하러 왔다가 내려가는 길에 절에 들렀다. 대웅전 옆 탁 트인 산자락에 거대한 석조 약사여래 불상이 있었다. 왼손에는 약병을, 오른손에는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는 동그란 한약을 든 온화한 표정의 부처님 앞에서 아이와 나는 기도를 했다. 자폐증을 고쳐달라고. 내 아이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빌었다.

사월 초파일이 머지않아서 사찰로 올라가는 길 초입부터 알록달록한 연등이 걸려있었다. 

나는 종교가 없었지만 하늘나라로 간 아이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평일 오후 절마당에는 깡총거리는 까치 몇 마리와 유유히 걸어가는 얼룩 고양이뿐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약사여래불을 향해서 절을 했다. 고요한 사찰 마당에서 절을 하고 있으니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원망보다는 아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이 짙어졌다. 신경안정제에 취한 채로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던 몸이 세상을 저버린 어린 자식의 영혼을 위로해달라고 비느라 부지런히 엎드렸다가 일어났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나는 쉬지 않고 절을 했다. 가벼운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니 마른 체구의 스님 한분이 서 계셨다.

“절을 열심히 하시는데, 뭐 형식이야 상관없지만... 불교식 절을 배운 적이 없으신 것 같으니 가르쳐 드릴게요.”

스님의 표정은 온화했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두 발을 벌리고 서서 손을 모으고.” 나는 스님의 자세를 따라 했다.

“바닥에 양 손바닥을 대고 절을 한 후에 이마를 붙이세요.” 엎드린 나의 귀에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바닥을 뒤집으세요. 이는 나의 행동으로 인한 죄를 뉘우침입니다.”

나는 어린 자식의 잘못을 나무라며 때렸던 나의 죄를 뉘우치며 손바닥을 위로 들었다. 

“합장하면서 일어나서 다시 한번 절을 하세요. 손바닥을 땅에 대고 이마를 대고 손바닥을 뒤집으세요. 이는 말로 상처를 주었던 죄를 뉘우침입니다.” 

나는 아이에게 말로 상처를 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뉘우쳤다. 아이가 국어시간에 제출했던 과제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잘했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너 뭐야”였다. 아이가 내 기대에 못 미칠 때마다 나는 “너 뭐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손에 닿는 것은 뭐든지 입에 넣고 생각을 말로 잘 옮기지 못하는 너에게, 행동이 느린 너에게, 죽을 각오로 노력해서 자폐증을 고치지 못한다면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당장 입 속에 있는 비닐조각을 뱉고 손을 씻고 와서 문제집을 풀라고 가르쳤다. 

그랬다. 나는 아이의 앞날이 두려웠다. 공포에 질려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죽고 나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면 어떻게 될지가 두려웠다. 고교 입학 전에 특수반 교사들을 찾아가서 진학상담을 했었다. 

그들은 아이의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으니 정부기관이나 사기업에서 소수 채용하는 장애인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능력 여하에 따라 청소나 포장 등 단순노동을 하거나 보호 작업장에서 일하거나, 정신장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차별 속에서 평생 살아가야 하는 삶이었다. 

나는 하나뿐인 내 소중한 아이가 남들처럼 많은 것을 누리고 경험하기를 바랐다. 돈이 많이 드는 사교육은 아니더라도 힘닿는 데까지 아이의 정서적 신체적 발달을 돕기 위해 수많은 체험활동을 하도록 했다. 아이는 수영을 배워서 자유형과 평영과 배영을 할 줄 알았고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와 스키를 탈 줄 알았으며 수많은 보드게임과 체스를 할 수 있었고 바둑도 둘 줄 알았다.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해서 대원들과 캠핑을 갔으며 대만과 새만금에서 열렸던 2박 3일간의 세계 잼버리 행사에도 참여했다. 아이는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탔고 잔잔한 바닷물에 누워서 배영을 즐겼으며 볼이 빨갛게 되도록 신나게 스키를 탔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 아이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졌다고. 내가 상상도 못 할 일을 실행에 옮긴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거라고.

자폐증이 있으면서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고 수학을 좋아하고 영어 문장을 잘 외웠으며 대학에 진학해서 멋지게 살고 싶다는 야망이 있던 그 아이에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와 싸워야 하는 삶은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 아이를 괴롭힐지 몰랐다. 

하지만 아이가 자살한 상황에서 자책하지 않을 부모는 없으리라.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전까지와 다르면서도 더욱 고통스러운 지옥이 되었다.


“다시 절을 하고 손바닥을 뒤집으세요. 이는 내 마음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스님의 음성은 온화하고 한결같았다. 

“이제 합장을 하면서 마무리합니다.”

자식을 떠나보낸 죄로 인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와 마주 서서 합장한 후 스님은 돌아서서 걸어갔다.

나는 ‘연등 접수’라고 써놓은 이동식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사월초파일까지 절마당에 걸어놓을 연등을 접수하는 중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연등을 보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색깔인 노란색으로 연등을 걸고 싶었지만 이승을 떠난 이들을 위한 영가 등은 흰색이라고 했다. 

접수하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복위자’에 나와 남편의 이름을, 극락왕생을 비는 ‘영가’에 아이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내 몸속을 떠돌아다니던 소금물은 눈물샘을 통해서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백일이 될 때까지 매일 절에 갔다. 

아무 때고 열어놓은 대웅전의 창호지 문을 당겨서 부처님 앞에 절을 올렸다. 아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일은 돌봐야 할 아이가 사라져 버린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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