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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Jan 13. 2022

핫도그를 바닥에 떨어뜨린 실수 하나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하늘이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식탁에서는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올해 7살이 된 조카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입을 삐죽거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이유인즉은, 하늘이가 조카가 먹던 핫도그를 먹기 편하게 막대 위로 끌어올려주다가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 때문에 조카의 울음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는 실수로 바닥으로 날아간 핫도그에 너무 놀라 재차 사과를 했지만, 조카의 눈물은 그 치치 않았고, 할머니에게 “시끄러우니 그만 좀 울어!!”라며 혼나고 있었다. 상황은 그런 채로 진행 중이었다.


        

나는 대략 상황을 파악하고는 “에이, 바닥에 잠깐 떨어진 거면 그냥 먹어도 괜찮아”라고 조카에게  말하며 하늘이에게 사과했는지를 물었다.

하늘이의 입장에서는 낮에 큰 조카와 둘만 핫도그를 먹은 게 맘에 걸려서, 일부러 핫도그를 데워주고, 케첩을 뿌려 주고, 먹기 좋게 막대기에서 올려주다 생긴 참사였고, 이미 그 순간 충분히 사과했으니, 그런 질문을 하는 나를 원망하는 듯 쏘아보다가 울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상황이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모, 지금 상황이 정말 이상해요! 다 이상해요! 할머니는 지온이가 먹던 게 떨어져서 울면

그냥 달래주고 해결해 주면 되는데 소리를 질러서 계속 울게 만들고, 이모는 언니한테 사과했는지 물었더니 언니는 방에서 울고 있고, 지온이는 계속 울고 있고, 할머니는 또 소리를 지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엄마, 애가 그런 일로 울 수도 있지. 엄마가 좀 달래주면 될 것을 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모두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잖아” 라며 시작한 대화는 엄마가  “그만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단절로 이어졌다. 조카는 그 사이, 식탁으로 걸어와 핫도그에 케첩을  듬뿍 발라 먹고 있었다.     


나 역시 기분이 상해 방으로 들어와 분을 삭이고 있으니 밖에서 푸념 중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 봐준 공은 없다더니,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나 역시 엄마에게 반박하고 픈 이야기가 줄줄이 떠올랐고,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평화를 깨뜨리는 그 행렬을 가만히 지켜보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조카의 말이 맞았다. 누군가 아이를 좀 달래주기 위해 적절한 행동을 취했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일이다. 바닥에 떨어진 핫도그를 얼른 주워 케첩을 더 뿌려서 주면 간단히 해결되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 가시를 삼킨 듯 가족 모두를 불편한 결과를 만들어 버렸다.     


엄마는 왜, 아이들의 눈물을 볼 수 없을까? 수없이 엄마를 이해시켜 보려 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속시원히 한번 울어보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감정을 해결하는 것이 빠르다고, 아이들에겐 실컷 울고 또 울어도 괜찮은 것을 확인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후련하고 마음이 단단해지는 일인지를 얘기했었다.

하늘이가 단단히 자랄 수 있던 이유 역시,

자신의 모든 감정을 허용하고 받아들임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엄마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긴박(?)한 순간엔 자동적으로 잊힌다.     


조카가 울지 않고는 못 배기듯이 그 울음소리가 엄마의 내면에서 소리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우는 아이에게 소리부터 지르는 엄마를 보면 우울하고 화가 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연쇄 반응에 의해 ‘갈등’은 심화되고, 굳혀진다.


동생을 도와주려고 실수로 핫도그를 떨어뜨리는 일 같은 것으로 인해,          

누군가는 입을 닫아 버리고, 누군가는 계속 화를 내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돕는 행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누군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럴까? 하고 고민에 빠진다.






우연히 신동엽의 미친 사랑 X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암세포를 유발하는 자극적이기만 한 프로그램을

멀리하는 편이지만, 오은영 박사님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구미가 당겼다.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를 보여주고, 오은영 박사님을 비롯한 전문가의 명쾌한 견해가 흥미를 더했다.


그중 가스 라이팅에 관한 사건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한 사람이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모든 과정 결말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제목은 거미줄이었다. 이야기는 피해자의 '남편의 상사의 아내'가 동네로 이사를 오면서 시작된다. 가해자(남편의 상사의 아내)는 피해자의 남편과 불륜관계였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피해자에게 친절을 가장하여 접근하여 교묘하게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도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며(실제로 도움을 받았다면, 빠져나오기 힘들다고 한다)그녀를 세뇌시킨다. 피해자는 그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부부는 이혼을 하고, 아이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끔찍한 결말이었다.


가스 라이팅은  “친절을 가장해 관계가 시작이 되고, 관계가 시작되면 상황을 왜곡한다. 일상에서 사소한 문제를 침소봉대한다. 반박을 하면 거부를 하고, 판단이나 기억을 폄하하고 축소시킨다. 평판이나 판단력을 깎아내리고 다른 사람부터 고립시킨다”

 “가스 라이팅을 당하면 불안증과 우울증이 온다. 심하면 가성 치매도 온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다”   오은영 박사


너무도 안타까웠다.  아이는 죽기 전까지 엄마에게 배고픔을 호소했다. 처음 가해자는 아이에게 소시지를 먹이는 것을 지적하면서 편식하는 아이의 습관에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양육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을 장악해 버렸다. 이혼과 재정상황까지 모두 다 가해자의 손아귀에 의해 움직이다가 결국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잠시 피해자인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가 죽기 전 그녀는 자신 모습은 무기력했고, 그것은 자신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내어 줄 수밖에 없었을까?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아이들은 대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줄 알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줄 안다. 아이들의 중심은 너무도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를 배려할 틈이 없다. 아이들로써는 매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상태다.


그런상태에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중심은 조금씩 나를 벗어나 타인과 사회로 분산된다. 이때 부모에게 심한 꾸지람이나 감정의 억압, 일관되지 않은 양육방식 등을 많이 경험하게 되면,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사고의 틀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자신에게 두었던 중심이 흐트러지며, 부모나 타인, 사회에 휩쓸려 그것과 맞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과도한 죄책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맞추기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자존감의 부재의 원인이며, 의식이 나를 벗어나 타인에게 향해 있을수자존감은 결여 될 수 밖에 없다.


유난히 감수성 풍부했던 나였고, 눈물도 많았다. 아무 때나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내는 것은 고역이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는 꼬락서니 신물이 난다."

"왜 아침부터 재수 없게 눈물이냐"

"그런 네가 뭘 할 수 있겠냐"
"그렇게 병신같이 굴 거면 나가 죽어"


이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양육자로부터 받은 최초의 가스 라이팅이었다.  그것은 두고두고 내가 나 스스로를 라이팅 하는 원료가 되었고, 그 이후엔 누군가 나를 가스 라이팅 하게 만드는 원료가 됐다.


실제로 나는 실컷 울어도 되는 수행법을 제공하는 어느 명상단체에 수행에 참가하고, 몇 년에 걸쳐 수행을 하며  (시사매거진에 나올 만큼) 심각한 세뇌를 경험했다. 나의 모든 주권을 마스터에게 넘겨 버렸고,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은 엄청난 불안과 깊은 우울이 나를 덮쳤다. 그렇게 완전히 길을 잃은 것만 같았을 때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주권이 있고, 때에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그것을 되찾아 올 수 있는 힘도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를 완전히 잃고 나서야, 나를 만났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중심이 나에게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의 어디쯤이나, 외부의 대상에게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을 지키는 법은 간단하다. 지금 이순간 내가 있는 곳에서 의식을 집중하면 된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과 손끝에 닿는 감촉은 어떤지, 창문 밖으로 오고가는 차량의 행렬의 느낌은 어떤지, 나의 마음은 평온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인지,


만약 아직 어젯밤 누군가와 빚은 갈등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면, 나에게서 먼저 그 이유를 찾아

갈등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내안의 갈등이 먼저 해결되야 상황과 방법이 보인다.


해결은 그 다음이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때 진심으로 사과하면 된다. 그래도 결코 늦지 않다.

습관적으로 나의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거나, 나의 마음은 무시한 채 상대에게 사과부터 하고 본다면(물론 그것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의식이 중심에서 벗어나 타인을  향해 있다면 삶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점검해야한다.


뿌리가 단단한 나무처럼 내면의 중심을 확고히 하고 바로 서야 한다.

뿌리가 튼튼하고 중심이 바로 선

나무는 성장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존재의 쉼터가 될 수 있다.  

중심이 바로 서지 않은 채로, 가지와 꽃이 먼저 활개를 치는 나무는 비와 바람에 상처를 입기 쉽다.



 핫도그를 바닥에 떨어뜨린 실수 하나 때문에

가스 라이팅까지 나오다니!!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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