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깃든 물건
퇴근길에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오늘은 점심약속으로 외출을 해서 토요일인 데도 아이들끼리
챙겨 먹어야 하는 점심이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결혼 20주년 축하해요” 하는 것이 아닌가?
“하루 종일 문자 안 보내길래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었네?
고마워~~"
오랜만에 특별한 음식으로 저녁을 차려먹고, 아이들이 깜짝 선물로 마련한
티라미수 케이크와 함께 조촐한 축하파티가 이어졌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이들이 철저히 준비를 해서인지 예상 못한 만큼
감동이 두 배인 시간이었다.
귀염둥이 딸이 정성껏 써준 편지를 정리해 놓기 위해 클리어 파일을 펼쳤다.
그곳에는 남편과 연애할 때 주고받은 편지들을 비롯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기념일마다 써준 알록달록한 카드들이 추억과 함께 담겨있었다.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아빠에게 써준 편지를 읽는 대목에서는
"사랑의 비타민"이라는 이름을 달고 붙어있는 레모나가 아까워서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서 먹을 수도 없겠지만~
각종 기념품과 편지, 카드 등 추억에 관련된 물건들은 은근히 정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대부분 그냥 박스에 담아놓는데 딱히 꺼내놓을 자리도 없고
정리하기 번거로워서 열어보지 않고 구석 자리만 차지하게 된다.
또 해외에서 사 온 기념품이나 한정품 피규어들은 아끼느라고 꺼내지 못하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귀중한 것이라 단단히 포장해서 침대아래에 숨겨놓는다면 그게 정말
나에게 소중한 물건일까?
좋아하는 것이라면 보관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디자이너인 남편이 가끔 가던 해외출장은 특이한 기념품을 사 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예쁜 물건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아주 행복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주방용품이라기에는 예술작품에 가까운 술잔과 동물모양의 소금후추통은 깨질까 봐
상자도 뜯지 않고 보관해 오다가 이제는 식탁 위에 꺼내놓았고,
가끔 멋 부리면서 와인 마시고 싶을 때 사용하고 있다.
그 물건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여행이나 출장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철없는 충동구매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하나하나에 의미가 깃들어 있는 만큼 쓸 때마다 관련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또 하나의 얘깃거리가 창조되는 추억의 물건이 되어가고 있다.
꼭 간직하고 싶은 편지들은 북타입의 파일을 마련해서 가지런히 꽂아 놓으면 좋다.
이렇게 정리해서 책장에 보관한다면 그냥 방치해 놓는 오래된 편지가 아니라,
가끔 읽어 보기도 편한 우리 가족만의 훌륭한 역사책이 될 수 있다.
유행이 지나 거추장스럽고 낡은 결혼액자는 사진만 빼내서 파일에 넣었더니
훌륭한 결혼사진첩으로 탈바꿈했다.
결혼 후 열어보지도 않는 무거운 결혼앨범이 아니라 가까이 두고
가끔씩 들춰보고 싶은 예쁜 사진첩이 된 것이다.
어설픈 궁전 콘셉트의 스튜디오 속 왕자님과 공주님,
어색한 포즈가 세련돼 보이지는 않아도 풋풋하고 예뻤던 우리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거 절대로 버리지 마.
나중에 늙어서 둘이 커피 마시면서
읽으면 재밌겠다
남편이 인기척도 없이 등뒤로 와서 들고 있던 커다란 보라색 카드 하나를 빼앗아 간다.
“어디 보자~~ 오. 빠, 우리 100일 축하해....
이거 봐 이거 봐. 노력 많이 했네~
자기가 나 엄청 좋아했다니까. 밑에 이거 초100개 그린 거 맞지? 큭-큭 ”
“어머! 자기는?
출장 가서 일은 안 하고 편지는 왜 썼대?”
스위스의 한 호텔 로고가 그려진 하얀 편지지에는 남편의 손 글씨로
나중에 꼭 함께 오자고 쓰여 있었다.
얼마인지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추억의 조각들은 그대로 남겨놓고 싶다.
차마 버릴 수 없어 간직하고는 있지만 너무 촌스러워서 부끄러운
우리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는 평생 못 틀어볼 것 같다.
이제는 좋아하는 물건을 간직만 하지 않고 꺼내서 만지고 매일 바라보기로 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만 있는 집! 그렇게 생동감 넘치는 집이 된다.
살아있는 물건들만 존재하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