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하기
집 앞 마트에서 장을 본 후 남편과 아이들은 자율포장대에서 박스포장을 시작하고
나는 평소와 다르게 물건 담아갈 박스를 신중하게 고르는 중이다.
“이번엔 좀 큰 게 필요한데....”
우리 집 앞 식자재 공판장은 워낙 규모가 크고 손님들이 많아서인지
출구 앞 자율포장대에는 빈 종이박스가 언제나 가득 쌓여있다.
구입한 물건을 박스에 담아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기부할 때마다 여기저기 동네마트를 돌며 라면박스를 얻으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던 터라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이렇게 박스를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참 좋았다.
내가 이용하고 있는 기부업체는 물품이 박스로 3개 이상 되면, 인터넷으로 방문수거 신청이
가능했기 때문에 <임시 보관바구니>에 물건을 모았다가 적당량이 되면 박스에 담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서 기부를 해오고 있다.
멀쩡하지만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이며 판매가 가능한 의류나 책 등 여러 가지
잡화들을 선별하여 박스포장 한다.
중고품이지만 다른 사람이 사용할 물건이므로 깨끗이 세탁하고 손질해서 넣어야 한다.
상태나 종류에 따라서 기부할 수 없는 것도 있으므로 가능한 물품인지 미리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필수 사항이다.
기부하는 일이 좋은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처음 의도대로 그 물건이 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정확하게 분류하고 끝마무리까지 빈틈없이 잘 처리해줘야 한다.
나도 이제 정리해서 수거신청할 때가 됐기 때문에 라면박스 3개가 필요했다.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듯 빈 박스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늘 저녁까지 박스정리를 완전히 해놓아야 내일 아침에 수거해 갈 수 있으므로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냉장고와 베란다를 분주하게 오가며 식재료를 정리하고 빈 카트는
접어서 원래 자리에 세워놓는다.
비워진 라면박스는 마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찢어진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튼튼하고 깨끗한 박스를 잘 골라왔다.
침대밑에서 임시 보관바구니를 꺼내어 그동안 모아둔 물건들을 라면박스에 분류해서
옮겨 담으며 수량을 체크하고 A4 용지에 매직펜으로 큼지막하게 적는다.
내용물과 박스 겉에 써붙여놓는 품목, 수량이 일치해야 하니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의류-25개, 도서-7개, 신발-2개, 잡화-5개...
아들은 내가 기부물품을 챙길 때마다 불만이 한가득이다.
벌써 자신의 미니카나 잡지등을 중고거래해서 용돈벌이 하는 아들입장에서는
내가 멀쩡한 물건을 그냥 남 줘버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엄마는 왜 기부를 하는 거예요?
돈 받고 팔지~ 아깝게…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면 그 물건이 꼭 필요했던 다른 누군가는
아주 싼값에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
그들은 싸게 사서 좋고 우린 연말정산 때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으니까 좋다.
중고사이트에 올리면 원하는 가격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중고거래에 별 소질이 없는
나는 더 빠른 처분이 가능하고, 소득공제도 받을 수 있으므로 이 방법에 만족하고 있다.
아들에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주고 포장된 박스를 바라보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현명하게 쇼핑했더라면 과연 이렇게 기부할 물건이 많이 생겼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중고거래에 능숙한 아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고판매가 아닌 이 방법을 선택했으니까 신중한 쇼핑을 다짐하며 기부를 한다.
이건 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서 죄책감 같은 건 벗어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쉽게 쇼핑하고, 싫증 나면 기부를 반복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 버릴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기부"가 충동구매의 "믿는 구석"이 되면 안 되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듭하면서 물건 구입할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꼭 필요한 물건만 사게 되었다.
덜어내는 물건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너무 많이 샀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아들은 내 말을 이해한 건지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나는 네이비 컬러의 페이즐 무늬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이 원피스는 예뻐 보여서 샀지만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사놓고 거의 입지도 않았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지난 몇 년간 옷장에 걸려만 있던 옷인데, 이렇게 옷장구석에서 썩힐 바에는
이 원피스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입는 편이 낫다.
옷이란 다른 사람이 입은걸 보고 예쁘다고 무조건 사는 게 아니라 직접 입어보고 어울리는 것으로
신중하게 골라 사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며 박스에 넣었다.
그래도 넘치는 물건으로 인한 민망한 기부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똑똑한 쇼핑을 하기 시작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