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ura Apr 29. 2024

한 달 치 삶의 비용

프랑스 학생들의 거주방식 collocation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쯤, 그러니까 꽤 쌀쌀한 날에 친구와 같이 당분간을 함께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스물 조금 안 되는 개수의 집을 둘러보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보다 괜찮은 집 없으면 여기로 하자"라는 말을 정말 여러 번 했는데, 우리가 계약한 집을 보고는 둘 다 "여기로 하자"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음이 일치하는 점은 언제나 신기합니다. 그렇게 계약을 했고 1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도착하기 전까지 얼굴도 본 적 없는 3명의 프랑스 사람들과 살고 있습니다. 침대와 책상이 딸린 개별의 방이 있고, 주방과 욕실을 비롯한 다른 공간은 함께 사용하고 각자의 몫만큼 월세를 낸다는 점에서 이 둘은 어쩌면 같은 거주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낯선 곳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진출처 : 본인



Collocation

 


"Collocation(꼴로까시옹)"은 프랑스의 학생들에게 기숙사만큼이나 흔한 거주방식입니다. 여러 명의 학생이 아파트 하나를 공유하는 시스템으로,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합니다. 심지어는 3층짜리 집 하나에 9명이 사는 곳도 보았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공동거주 혹은 셰어하우스라고 할 수 있는 이 거주형태는 집값이 비싸서 생겼기에 '덕분에'라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어쨌거나 Collocation이 보편화된 덕분에, 편리한 사이트와 플랫폼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트를 통해 방에 비치된 가구와 사진, 집 평면도, 주방 집기, 시설, 층수, 방향, 그리고 3D 시뮬레이션을 통해 집에 가본 것처럼 자세히 볼 수가 있습니다. 계약서 작성을 비롯한 모든 절차 역시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며, 지정 장소에서 키를 수령해서 해당 집으로 이동하여 문을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분리수거를 비롯해 필요한 모든 사항을 역시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집을 구할 때 어플이나 사이트로 집을 보고 연락을 하면, 부동산 사무실에 방문합니다. 부동산 직원과 함께 집을 보는데, 때때로는 이전 세입자가 아직 거주 중일 때도 있으며 거래는 집주인과 직접 부동산에서 할 때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계약과 실제 거주까지 누구도 만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수십 개의 집을 찾아보면서도 부동산 직원도, 집주인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꽤 많은 실제가 만들어준 상상처럼 흰머리 희끗한 사람이 나타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과정 없이 어떠한 집에 살게 된 일이 저에게는 아주 낯설었습니다. 


 친구와 어떤 가구를 놓을 것인지부터 어떤 배치를 할 것인지를 모두 함께 결정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함께 쓸 가구를 당근마켓을 통해 거래하고 끙끙대며 가져오던 그 순간에서부터 이미 단순한 '룸메이트'의 의미를 벗어났다고 확신합니다. 계절이나 기분의 변화에 따라 거실의 배치를 바꾸고 주말이면 함께 대청소를 하고 귀가 시간을 묻고 함께 밥을 먹습니다. 한 지붕에 사는 가족과 으레 그러하듯이요. 아침에 더 바쁜 사람이나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사람을 위해 밥을 하기도 하고, 굳이 비가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우산을 쓰고 장을 보러 가기도 합니다. 감자탕을 보글보글 끓여 먹으며 잔을 부딪히던 그런 순간에는 낯간지러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같이 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 명이 쓰는 데도 언제나 작게 느껴지던 4인용 식탁에서는 수많은 식사와 밤의 이야기, 그리고 졸업전시에 대한 모든 고민부터 진지하면서도 큭 하고 웃음이 나올 법한 삶에 대한 고민도 오갔습니다. 한 지붕아래에 사는 사람들을 왜 "식구(食口)"라고 말하는지, 끼니를 같이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가족이 아닌 친구와의 동거를 통해 배웠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3개의 기숙사와 자취방을 옮겨 다니며 언제나 가족의 '한 지붕 아래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타인을 통해 '식구'나 '한 지붕 아래'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애정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모인 사람들 역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습니다. 하지만 이 선을 잘 넘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오기 전까지 함께 살던 동갑의 3명의 친구들은 가깝게 지냈을 법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 일도 드물뿐더러, 노크를 하는 일도 많지 않습니다. 냉장고와 접시를 공유하지만 음식에 대한 긴 대화를 잘 나누지 않고, 당연히 서로를 위한 음식을 하지도 않습니다. 친구와의 거주와 Collocation은 이러한 긴긴 이유로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월세를 내는 날이면 살아있음의 값이 유독 무겁게 느껴집니다. 한 달 치 삶의 비용이라고 해야 할까요. 언제나 크게 다가오는 이 금액을 얼굴이 없는 실체인 어떤 회사의 사이트를 통해 결제합니다. 집 계약날 얼굴을 보고 서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던 집주인의 계좌에 돈을 보내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적어도 500유로만큼의 삶을 살아내야 이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숨을 쉬고 잠을 자는 데에도 꽤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느낌, 그러나 부모님께 넙죽넙죽 생활비를 받아 쓰는 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것을 느껴도 되는 것일까요. 


 만약 월세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삶이 끝나지 않을 줄은 알지만, 돌아가는 비행기표도 구매하지 않은 저에게는 왠지 월세를 내지 못하면 금방이고 역 근처나 공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옆에 나란히 눕게 될 것만 같은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것을 열심히 무엇을 하여도 500유로 + 알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불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집을 짓고 먹을 수 있는 풀과 먹지 못하는 풀을 구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돈에 의지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 텐데요. 이런 사람들이 아주 예전에 살았을 것만 같이 느껴지지만, 몇 세대 전만 해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는 발을 땅에 딛고 걷고 뛰면서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음식을 구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 사람들은 주어진 신체와 주어진 자연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더 본질적인 고찰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식물을 잘 기르는 법도, 먹지 못하는 풀을 구별하는 법도, 도구 없이 불을 피우는 법도 모릅니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정한 의미에서 먹고사는 법을 잊어버린 현대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 05화 불편함, 동시에 소중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