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와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
프랑스에서 노숙자는 SDF(Sans domicile fixe)라는 줄임말로 부르며, 고정된 거주지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문제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들이 개와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를 비롯한 남부의 수많은 도시에서도 그 모습을 보았고, 프랑스에서 온 뒤 며칠 만에 눈에 들어왔던 의문점이었습니다. 담요 몇 장을 마루 삼아 살아가는 그들의 담요 위에는 개 한두 마리가 머물러 있습니다. 개들도 사료든 밥이든 식량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고정된 주거지를 마련할 수 없을 만큼 생활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개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게만 보였습니다.
기사도 찾아보고 이곳의 친구들에게 질문도 하며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2명의 친구에게 질문을 했고 다른 종류의 다른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외국인 친구는 개와 함께 할 때 경찰이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습니다. 개의 보호처가 불분명해지고 꽤 난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기사를 비롯해 정보를 찾아본 결과, 개를 키우는 주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 태어난 프랑스인 친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그 친구는 보호와 동정심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큰 개를 키우면 작은 위협으로부터 조금은 안전할 수 있고 때로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더 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파리에서는 개를 키우는 노숙자들에게 사육보조금이 지급된다는 것도, 겨울에 함께 체온을 나눈다는 것도 다 이해 가능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해관계가 그러하듯이 이 문제 역시 단편적인 이해로 끝낼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가족으로 반려견을 여기고 있기도 하니까요. 어떤 이들이 목적으로 개를 대하고 어떤 이들이 가족으로서 개를 대하는지 구별할 수 없을뿐더러, 구별 가능하다 하여도 목적과 개들의 생활이 언제나 일치하는 법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한 주인을 가진 개들이 더 풍요롭게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자는 것만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마음을 다한 존재가 수단이 되기도 하며 반대의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와 함께하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들은 어쩌다가 개와 함께 길에서 지내게 되었고, 혹은 어쩌다가, 어떻게 길에서 지낸 이후 개를 데려오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들을 사회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일부로 수용하고 있을까요? 혹은 수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묻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들의 삶은 외부의 연민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맞을까요? 그들에게도 '삶'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왜 계속 거리에 머무는 것일까요?
'그들이 거리에 있는 이유'를 추론하지만 결국은 연민이라는 마음상태에 닿곤 합니다. 짐작과 추론, 그리고 연민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저의 오만을 비웃는 듯한 전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20-2021년 한가람미술관의 퓰리처상 사진전이었는데요, 한 기자의 시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톰 그랠리쉬의 <홈리스>라는 사진이었고, 그는 노숙자와 가까워지기 위하여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스스로를 사회와 규범에 종속되지 않은 마지막 자유인이라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톰의 사진 속 노숙자는 박스를 집 삼아 겨울의 추위를 피하고 있지만, 어쩌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달팽이 집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담는 도구인 줄만 알았던 사진이 마음의 방향성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눈으로 목도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기분이 내킬 때 체스를 하고 맥주를 마시다가 괜찮은 길이나 벤치에서 잠을 자고, 공원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어쩌다가 구걸이 조금 더 성공적인 날에는 기차역에서 가까운 바다에 가는 티켓을 사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그곳의 공원이나 역 근처에서 또 살아가는 것이죠. 어떤 이들은 항상 손에 술병이 들려있고, 또 어떤 이들은 담배를 구걸해서 피지만 절대 개의 끼니는 굶기지 않고, 또 어떤 이들은 술은 마셔도 담배는 피우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항상 자는 곳에서만 자고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잠은 같은 자리에서 자지만 낮에는 활동성이 있는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거나 배제하며 살아가는 것처럼요. 그들은 어쩌면 동정의 눈빛을 받기에는 '삶'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도시의 골칫거리로 여겨지거나 '노숙자'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 여전히 제가 '그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여전히 그자들의 존재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연민으로 바라보고 있는 탓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인식과는 달리,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과 그 자체로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의 세상에 공존합니다. 수동적 희생자라는 일괄된 이미지와 단일한 삶의 형식으로 '집이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째로 묶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나 예민한 시선과 그것을 통해 바라본 것들을 안아줄 마음이 있어야겠죠. 벗어나고 싶은 사람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한 도움의 형태 역시 다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