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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30. 2022

[현재] 지금 여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떠난 랜선 여행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떠났던 2019년 유럽 교육기행부터 시작해서 방구석에서 과거와 미래를 오갔던 시간여행을 거쳐 나는 다시 현재, 지금 여기로 돌아왔다. 우리 학교에는 몇 년 전부터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교실 밖 답사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학, 역사, 지질 답사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다. 나는 문학 답사의 지도교사로 동료 선생님과 함께 윤동주 문학관, 보안 여관, 이상의 집 등 서울 서촌 일대를 학생들을 인솔하여 다녀왔었다. 어느 가을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문학 작품과 문인들의 향기를 찾아 나섰던 아이들과의 시간은 지금도 예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19가 유행하며 아이들과의 현장 답사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기에 이 프로그램은 잠정적으로 중단이 됐다. 코로나19의 위세는 갈수록 맹렬해 2021년에도 당연히 답사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2020년 사라졌던 이 답사 프로그램의 예산이 다시 잡혀 있었고, 결론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이 답사는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예산을 잡아 놓은 전임자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아니, 내가 무슨 수로 코로나를 뚫고 몇십 명의 아이들을 인솔하여 답사를 진행한단 말인가?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해야 하고 예산도 잡혀 있다면 이왕 하는 거 코로나 시대에 맞는 답사를 떠나보자! 그러던 중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 바로 ‘랜선여행’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종종 여행사 홈페이지를 둘러보고는 하는데, 어느 날 ‘랜선 바티칸 투어’를 인터넷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그래, 랜선으로 떠나면 되겠구나. 이미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랜선 투어가 여럿 있었기에 그중 아이들의 수요를 조사하여 희망 여행지를 신청하면 아주 쉽게 랜선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 답사를 진행할 때도 ‘또래 해설자’를 뽑아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자신이 맡은 장소나 인물을 소개하며 답사를 이끌어가도록 했던 것이 참 좋았었는데, 이미 전문 가이드가 있는 랜선여행을 신청하면 아이들의 이런 주도성을 발휘할 기회는 없었다. 부장님과 의논하며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여행의 전 과정을 아이들이 기획하고, 그 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프로그램을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걱정도 됐지만, 3년여의 시간 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만의 여행을 기획하고 개척했던 이 경험이 나에게 용기를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 시대에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니……. 그냥 그 생각만으로도 사실 설렜다. 업무가 일로 다가오지 않고 신나는 기획으로 다가오니 이 여행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준비 과정부터 기뻤다.


  먼저 기획단을 뽑기 위한 공모를 진행했다. ‘랜선여행’의 장점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점인데, 정말 아이들의 상상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총 15개의 팀이 지원을 했고, ‘내가 코로나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코로나바이러스 입장에서 여행을 하는 코스부터 문학 작품 속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보는 여행까지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들어와 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블라인드 심사로 치열한 논의 끝에 총 7팀이 선정되었다. 다음은 그 7팀의 기획안을 정리한 표이다.(학생들의 기획안을 수정하지 않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정리하였다.)    



  솔직히 좀 많이 놀랐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나 잠재력이 대단한 아이들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이런 활동은 특목고에서나 가능한 거 아닌가? 사실 기획안을 받으면서도 이게 과연 되려나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내 걱정이 완전 기우였음을 아이들은 멋진 기획안으로 증명해냈다. 교과와 연결하여 다양하게 기획한 여행 코스들은 실제 잘 구현만 된다면 당장 랜선 여행사 홈페이지에 올려도 판매가 가능할 만큼 알차고 재미있고 훌륭했다.


  이제는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해낼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을 줄 차례였다. 나는 현직 랜선 가이드로 활동하시는 분들께 특강을 듣고, 직접 랜선여행에 참여해보는 게 아이들이 랜선여행을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사실 다양한 아이디어로 기획을 하기는 했지만, 기획단 아이들 중 누구도 랜선여행을 직접 손님으로서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 좋은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데 아이들도 나도 막막함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두 분의 현직 가이드를 섭외할 수 있었고, 우리 학교 기획단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프라이빗투어를 개설해주셨다. 이렇게 아이들은 랜선으로 서울 경복궁과 런던 영국박물관 두 곳을 여행하며 랜선여행이 무엇인지, 그리고 특강을 통해 랜선여행을 기획할 때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지, 또 현재 기획서에서 어떤 점을 더 보완하면 좋은지 피드백을 꼼꼼하게 해주셔서 생생한 꿀팁들을 얻을 수 있었다. 실제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 아이들이 꿈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 시간이었다.


  특강을 들은 후부터 이후의 작업은 모두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였다. 첫 단계는 여행 코스 개발 및 자료 조사였다. 전문가 가이드께서 짧은 제한시간 내에 너무 많은 곳을 여행하려고 욕심을 내기보다는 꼭 전달하고 싶은 곳을 선별해 강조하는 게 좋다고 조언해주셔서 많은 모둠에서 코스를 축소하고 포인트를 잡고자 주력했다. 도서와 영상 자료를 통해 정확한 자료를 수집한 후, 고등학교 수준에 맞는 용어로 풀어 대본을 작성하는 것도 중요했다. 또 실제 친구들의 신청을 받아 라이브로 진행할 여행이었기에 모둠별로 아이디어를 모아 홍보 포스터를 작성하고 짧은 홍보 영상을 제작하고 친구들에게 줄 여행 기념품까지 직접 제작했다. 포스터와 영상은 마치 CF에서 만날 법한 양질의 홍보물이어서 정말 당장이라도 여행을 가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고, 특히 아이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모아 맞춤 제작한 여행 기념품은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홍보 영상과 포스터, 여행 기념품 일부를 공개한다.     







  특히 미국 경제 원데이 투어 팀에서 직접 디자인하여 제작한 항공 티켓은 처음 실물을 봤을 때 진짜 보딩패스와 똑같아서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지? 정말 감탄을 자아냈다. 두 장의 티켓 중 흑백 티켓은 21세기에서 20세기로 갈 수 있는 시간여행 티켓이었는데, 여행이 끝난 뒤까지도 정말 좋은 기념품이 되었다. 여기에 티켓 뒷장에는 투어와 관련된 의미 있는 사진과 함께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기프티콘의 바코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가 판만 잘 깔아주고 방향만 잘 잡아주면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구나! 처음 이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이 정도의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랜선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매일이 놀람의 연속이었다.


  랜선여행은 라이브로 이루어졌기에 각종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실제 여행 진행 전 리허설을 진행했다. 접속 문제부터 해서 다양한 변수가 있었고 실제 여행에서 의미와 재미 모두를 잡기 위해 여행 당일 직전까지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7팀의 아이들 모두 2회에 걸쳐 자신들이 준비한 랜선여행을 신청한 친구들 앞에서 너무나 멋지게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진행한 ‘야 너두 국가대표 할 수 있어’ 팀은 실제 비행기에 탄 느낌을 주기 위해 기내 방송을 진행했는데, 돌아오는 비행기가 인천에 무사히 착륙했음을 알리는 영어 기내 방송을 들으며 진짜 여행이 끝난 듯해 모두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큰 고비들도 있었다. 특히 기획단 아이들은 학업과 여행 기획을 동시에 해야 했고 또 개인 작업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였기에 시간 관리부터 갈등 해결까지 아마 심신이 지치는 경우도 많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기획단 아이들은 마지막 소감문에서 힘들었지만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뿌듯하고 즐거웠으며, 이 프로그램을 후배들에게 강력 추천한다고 했다. 그리고 참가자로 참여했던 학생들도 기회가 된다면 기획단으로 다시 이 프로그램에 꼭 참여해보고 싶다고 소감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교사로서도 수업을 포함해서 내가 2021년에 했던 여러 가지 일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나는 아이들과 함께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시대에도 분명 여행은 가능했고, 이 여행은 이제껏 내가 다녀왔던 어떤 여행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추억을 선물했다. 오늘도 나의,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 이후 이 랜선여행을 계기로 2023년, 교과서가 없는 고2 고전읽기 수업에서


- '사랑'을 주제로 한 고전 책 여행 리플릿 만들기

- 난민과의 대화

- 그림책 큐브 만들기


활동을 하며 학교 정규 수업에서도 더 넓은 세계를 꿈꾸고 지향하며 학생들과 함께 여행 중입니다. 이 이야기도 차근차근 브런치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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