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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30. 2022

에필로그

  2019년 8월 13일, 하를렘 할아버지 찾기를 끝으로 우리의 한 달여의 여정은 끝이 났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비행기 사이로 아름답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데, 마치 우리 여행의 끝을 보는 것 같아 만감이 교차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해냈구나! 모든 여행은 다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이번 여행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특히나 나에게는 더 값진 의미가 있었다.


  돌아가자마자 광복절 하루 쉬고 바로 개학이었기에 비행기에서만큼은 정말 푹 쉬겠다고 결심했다. 내 자리 근처에 학생들을 인솔해서 유럽을 다녀오시는 것 같은 선생님과 끊임없이 “선생님!”을 외치는 아이들이 있어 벌써 개학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교사인 걸 잠시 잊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륙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기내에 방송이 나왔다. 위급한 환자가 발생했으니 기내에 의료진이 있으면 승무원한테 알려달라는 방송이었다. 환자 발생이라고? 눈을 떴다. 처음에는 정확히 상황을 몰랐으나 승무원들의 다급한 움직임을 보고 곧 내 자리 근처의 손님이 위중한 환자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기내 위급 상황 발생은 뉴스에서만 보던 상황이었는데, 어쩌면 회항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내 뒷자리에 앉은 여성 한 분이 차분한 표정으로 승무원에게 손을 드셨다.     


“제가 의사인데, 어떤 상황인가요?”     


승무원은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 후, 그분을 환자의 자리로 데려가셨다.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당황한 상황에서 그분은 너무도 침착하게 기내의 의료 도구를 가지고 응급처치를 하셨다. 뒤에서만 본 거라 확실치는 않으나 처음에는 의식이 없으셨던 것 같은 환자분의 의식이 곧 돌아왔고, 다행히도 상황은 호전되었다. 이후 링거를 놓아야 하는데 흔들리는 기내에서 링거액을 고정할 만한 장치가 없었다. 이때 승무원이 기지를 발휘했다. 신분증 목걸이에서 줄을 빼 머리 위 짐칸 사이에 단단하게 고정을 했더니 훌륭한 지지대가 되었다. 승무원과 의사 선생님 덕분에 다행히도 그분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이후에도 인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계속 환자를 체크하고 돌보는 역할을 너무도 세심하게 수행하셨다.


  또 한 번의 배움의 순간이었다. 일단 위기 상황에서 너무나 훌륭하게 자신의 직업적 전문성을 발휘하여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의사 선생님과 승무원의 모습이 정말 멋졌다. 손님으로 탄 비행기에서 비행시간 내내 환자분을 신경 쓰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의사 선생님과 친절한 기내 서비스는 물론이고 위기 상황에서 지혜를 발휘해 기내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승무원의 직업의식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기내에서 내가 고른 영화는 ‘증인’. 영화 속 멋진 변호사의 모습을 보며 여행 중 내가 만났던 멋진 직업인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프랑크푸르트 호텔 프런트에서 친절하게 우리의 여행 목적을 묻던 토비아스(Tobias). 처음에 이런 걸 왜 묻지? 의아해하는 우리에게 기관 방문 목적으로 온 거면 도시세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설명(그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다.)부터 늘 웃는 표정으로 명소, 식당 추천 등을 살뜰히 해줬던 그는 최고의 호텔리어였다. 로마에서 유학 중이신 손서영 사서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학교 김진영 사서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인연인데, 연구하는 교사로 성장하기 위해 교사로서 흔치 않은 로마 유학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셔서 끊임없이 전공 분야의 발전을 꾀하시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이탈리아 여행 내내 사려 깊게 교통부터 음식까지 사소한 궁금증도 다 받아주셔서 참 든든하고 감사했다.) 이밖에도 여기에 다 나열하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겠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분들은 물론이고 시간을 거슬러 함께한 바티칸의 미켈란젤로, 바이마르의 괴테, 암스테르담의 고흐까지……, 


  내가 만난 멋진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직업을 수행할 때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주어진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열정과 진심을 다해 전문성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영역에서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었다. 기내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리라 다짐했었는데, 여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나는 걸 보니 이 여행은 역시 평범한 여행은 아닌 듯했다.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 인터뷰 때 역으로 카린이 내게 핵심어 한 줄 정의를 물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앞으로 어떤 교사로 살아갈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10년 차가 지나고 20년 차를 향해 가면서 30대의 삶의 고민과 겹치며 교사로서의 자아상이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분명한 해답을 찾았다.      


‘학생들과 배움을 공유하며 함께 성장하는 교사’     


가만히 있으면 달라지는 건 없다. 구해야 얻을 수 있고 두드려야 문이 열리며 움직여야 변화가 생긴다.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거쳐 책을 쓰게 된 건지는 지금 이렇게 마지막 에필로그를 쓰면서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두드렸기에 믿기지 않을 만큼 이 귀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바티칸에서 삼종기도(Angelus) 시간에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정말 멀찌감치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54차 홍보 주일 담화에서     


“삶이 이야기가 됩니다. 
모든 위대한 이야기 안에는 우리 각자의 이야기도 포함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여행, 나의 이야기가 세상을 선하게 밝히는 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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