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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12. 2024

말할 수 없는 비밀

정실질환자를 가진 가족의 이야기 

오늘 아내의 조울증 이야기를 해 주신 택시 기사분의 이야기를 쓰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가족 중에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친오빠이다. 나의 속 마음을 꺼내놓고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굳이 먼저 입 밖으로 꺼낼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친구들이 내게 "너는 형제자매가 있어?"라고 물어보면 오빠가 있다고 쉬이 말할 수 있었으나 "너네 오빠는 무슨 일 하셔?"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엔 부끄러웠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오빠가 있고 무직이다. 계속해서 서비스업에서 일을 하나 '애가 이상하다'며 쫓겨나고 충동구매로 인해 빚을 지고 쫓기듯이 막노동을 근근이 하며 조금씩 갚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소꿉친구들 조차 모를 것이다.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성도 못 느꼈고, 이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시선을 받을 것 같아 그게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쨍그랑! 쾅! XX!


나는 어릴 적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ADHD를 가진 오빠는 단순히 산만한 것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충동성도 심했고 폭력성도 심했다. 부모님은 그런 오빠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당시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정보도 부족할 때라 무지에 대한 답답함도 컸다고 하신다. 어릴 때 오빠는 조금만 화가 나도 집안의 물건을 때려 부수었다. 집안의 TV, 전등, 접시 등 온갖 물건들이 남아나질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날 때면 눈물이 차올랐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친구 집 혹은 할머니 댁으로 피신시켰다. 뉴스 기사에 자식에게 칼부림을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를 볼 때면 남 일 같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도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오빠가 폭주할 때마다 휴대폰을 가지고 갔고, 집에 있는 칼을 몰래 숨겼다. 


'애가 미친놈이면 학교를 다니게 하면 안 되죠!'


실제로 당시 오빠가 초등학생일 때 부모님이 초등학교 교사한테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흔하지만 ADHD는 당시에 흔한 질병도 아니었고, 당연히 이해를 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오빠는 당시 같은 반 친구들을 마구 때렸고,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산만하여 수업에 방해가 되었다. 부모님은 매번 학교에 불려 가 죄송하다며 수없이 고개를 숙였고 집에 와서는 고통스럽게 우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중산층인 우리 집은 오빠의 병원비를 낼 수 있는 환경이었고,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마음에 당시 오은영 박사님께도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정신병원에도 입원을 했었고, 도저히 바뀌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신 부모님은 오빠를 저 멀리 부산에 있는 센터에 보내기도 했다. 나는 워낙 어릴 때라 정확히 어디를 간 지는 모르지만 서울, 대전, 부산 등 안 가본 곳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오빠는 '부모님은 나를 버렸다.'라는 생각이 커졌고, 유기에 대한 불안감,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자연스레 커졌다. 서른 중반이 된 우리 오빠는 아직도 부모님이 나를 버릴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또한, 나에게도 "야, 너 결혼하면 나 안 볼 거냐? 영영? 나 볼 거지?"라며 여러 번 내게 물어보기도 한다.


오빠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정신 질환을 가진 가족이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른다. 오빠에 대한 원망, 분노, 그럼에도 가족이기에 안타까움, 책임감 등 양가감정을 느낀다. 


'나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았다면 지금 좀 달랐을까?'라는 생각을 여럿 했다. 정말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해본 질문이다. 어릴 때 오빠가 폭주할 때 나는 움츠렸고, 도둑질을 했을 때 부모님이 분노하여 화를 내어 배가 고파도 밥을 달라고 하는 데에 눈치를 본 적이 있다. 꼬르륵 소리에 놀란 부모님은 '배고프면 말을 하지'라고 했으나 왜인지 나까지 죄인이 된 느낌이라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빠에 대한 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부모님은 점점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쳐갔고, '나 때문에 쟤가 저렇게 이상한 거다.'라며 자책도 많이 하셨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본 나는 너무나도 슬펐다. 신기하게도 오빠는 그래도 친동생이라며 나는 건들지 않았다. 그렇게 폭력적인 오빠가 동생인 나는 건들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신다. 


오빠는 친한 친구도 거의 없고 중학교까지 겨우 다니고 중퇴를 했기에 아는 사람도 많이 없다.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긴 친구에게 목메었고, '내가 밥 살게 나와'라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외로운 오빠와 함께 가끔 밖에서 밥도 먹었고, 서울 나들이도 여러 번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다 큰 성인이 가족이랑 논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같이 즐긴다라기 보단 '같이 놀아주고 있다'라는 생각이 커지며 점점 하기 싫어질 때도 많다. 


오빠는 어제도 폭주를 했다. 다행히도 어릴 때에 비하면 많이 차분해지고 폭주하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는 스스로 참으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 다만 어렵긴 하다. 어제도 어머니께 화난 것이 있어 소리를 질렀고, 분노가 풀리지 않아 접시에 대고 온갖 쌍욕을 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오빠에게 왜 욕을 하냐며 소리를 질렀고, 이에 더 화가 난 오빠는 음식을 바닥에 집어던졌고, "아빠한테 한 거 아닌데 왜 나한테 그래! 아빠한테 그런 거면 OOO 개새끼라고 했겠지!".  아빠 성함을 들먹이며 쌍욕을 하자 방에 있던 나는 '아 이거 또 일 났다. 큰일이다'하며 큰일이 나면 바로 112에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갔고, 가운데에서 둘을 중재했다. 아버지와 오빠 둘 다 흥분을 하고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내가 억지로 오빠를 방으로 끌고 갔다. 둘이 싸우면 큰일이 날 것을 알았기에 오빠도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정신과 간호사답게(?) 오빠와 면담을 했다. 이후에 화를 가라앉히긴 했지만 30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아직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오빠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릴 때 막연하게 '왜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 오빠를 이해해보고 싶기도 했다. 부모님도 모르지만 야간에 몰래 오빠가 먹는 정신과 약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먹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삶에 영향을 준 것이다.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다 보면 환자분들 보호자분과 마주칠 일도, 유선으로 면담을 할 일도 많다. 다소 지친 보호자들의 전화를 받을 때면 너무나도 공감이 되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을 졸이며 사는 가족들. 어릴 때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끔 어릴 때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자식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힘드셨을지 차마 생각하기도 힘들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어릴 때에 비해 차분해진 오빠를 보며 그래도 나가서 일을 하려고 노력도 하고 (잘 되진 않지만) 스스로 분노도 참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병동에서 환자들은 우리 오빠보다 더 좋지 않은 증상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폭력적이고, 환청과 망상으로 인해 가족을 칼로 찌르는 존속살인을 하고, 퇴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환자들도 많다. 그런 환자분들의 부모님은 환자가 퇴원을 할까 하루하루 두려움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었고, 환자를 외면해 버리는 가족도 있었다. 다양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실제로 겪어본 사람은 감히 그들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정신질환이 나을 수 있을까 라며 기한 없는 기다림과 고통. 이는 정신질환을 가진 가족들의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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