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준 새로운 삶에 대하여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나는 씁니다. " - 롱랑 바르트 -
20대 후반까지 직업이 없었다. 나의 엄마의 논리에서 그랬다. 친구들과 남다른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한창 친구들은 ‘좋은’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물론 나도 공부하는 ‘척’했다. 불안했으니까.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국민 mc가 되기로 했다. 이는 학생들이 서울대를 목표로 둔 것과 비슷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서울대를 꿈꿨던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겠지. 시간이 흘러 친구들은 취직을 했다. 친구들이 한창 취직할 때도 꿈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어느샌가 친구들과 만나면 내 손에는 명함이 들려있었다. “너는 요즘 뭐 하냐~?”라는 질문에 꿈을 장황하게 말했다. “멋있네~”라는 말과 함께 각자 회사 생활의 고충으로 말을 이어갔다.
꿈에서 깬 뒤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토요일 포함 주 3일을 근무했다. 급여는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150만 원 정도를 받았다. 게다가 나에게도 명함이란 게 생겼다. 친구들을 만날 때 명함을 꼭 들고 다녔다. 직업이 생겼으니까. 이제는 남들과 조금은 비슷한 삶을 살아감에 안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아줌마가 집에 놀러 오셨고, 출근을 위해 문밖을 나서는데 엄마가 말했다. “아들 아르바이트 가는 거야". 내가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알바가 되는 순간이었다. 학원에서 인정받아 팀장, 부원장으로 주 5일 출근을 했을 때도 엄마는 ‘알바’라고 말했다. 학원 오픈을 하고 이름 앞에 원장 호칭을 달았을 때 알바라는 꼬리표가 겨우 떨어졌다.
학원 원장으로 살아온 지 8년 차. 가족이 생기고 금쪽같은 아이도 생겼다. 다른 아빠들 대부분이 출근하여 일할 시간에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았다. 어린이집에 갈 시기에 등원, 하원을 도맡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원장으로의 삶보다 아빠로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나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OO이 아빠는 직업이 뭐예요?"라고 물어왔다. 이때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말을 아내가 대신해주곤 했다. “학원도 운영하고, 글도 써요. 작가에요. 작가” 내 입으로 참아 담을 수 없는 작가란 말이 이름 앞에 붙는다. 아이가 태어나며 육아 일기를 썼다. 아이가 준 글 쓰는 삶이었다. 아이가 아빠를 글 쓰는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아직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며 고통과 좌절을 반복하고 있지만 지금의 삶이 즐겁다. 다시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아이가 준 새로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쓴다. 알바가 원장도 되는데 못 할 게 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