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나의 찬란한 도피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은 가오슝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컨딩으로 떠난다.
이른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힘들게 일어났다. 전날부터 약간의 빈혈기운이 있어서 몸이 좋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동안 먹은 것이 부실해서 그런가 싶다. 내 딴에는 나름 잘 챙겨 먹는다고 했지만, 역시 집밥보다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동안은 아침마다 간단하게 과일을 먹어왔는데, 오늘은 일부러 대만식 아침을 먹기로 했다. 지나가던 길에 현지인들이 많이 들어가는 가게를 발견하고, 나도 그곳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대만은 정말 조식의 나라이다.
보통은 새벽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오전에 영업을 마감하는 조식 식당들이 굉장히 많다.
주먹밥부터 샌드위치, 죽, 만두, 오늘 내가 주문한 프렌치토스트까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대체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구글맵에 아침식사(早餐)를 검색하고, 내 주변에서 평점이 가장 높은 가게를 찾아가는 편이었다. 이 가게 역시 위와 같은 방법을 찾아냈다.
메뉴판을 보고 무난하게 프렌치토스트 하나와 커피우유를 주문했다.
식빵에 계란물을 듬뿍 묻혀 구워낸 평범한 프렌치토스트지만 안에는 대만스타일로 肉鬆을 잔뜩 넣은 프렌치토스트였다. 조금은 낯선 비주얼에 이상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肉鬆은 굉장히 맛있었다. 씹는 식감이 좋아서 순식간에 토스트 하나를 흡입해 버렸다.
든든하게 아침밥을 잘 챙겨 먹은 후, 오렌지 라인을 타고 종점역인 시즈완으로 왔다.
아, 이제는 익숙해진 이 풍경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뭔가 좀 익숙해지면 떠나야 한다는 것에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나에게 가오슝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졌다는 의미겠지.
시즈완터널을 지나갔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면, 그곳은 원숭이 천국...
…이 아니라 국립중산대학이었다.
화장실이 급해서 일단 대학건물로 들어갔다. 너무 조용해서 방학중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다들 수업 중이었다. 아, 맞다. 지금 3월이지? 벌써 개학을 하고도 남았겠다.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직장에서 힘들게 버틸 때는 하루하루 날짜 지나가는 것을 세며, 퇴사 예정일만 기다렸는데, 퇴사 후 정신없이 놀다 보니 이제는 요일의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내가 회사를 떠나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 더 실감되었다.
가볍게 중산대학 캠퍼스를 거닐다가 그 길로 시즈완 해변을 따라 걸었다.
중산대학에서 다거우영국영사관까지는 도보로 약 19분~20분 정도. 날씨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바닷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그렇게 다거우영국영사관에 도착했다.
대만에 여행을 오기 전에 대만 역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었다.
그 속에서 '다거우'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다거우'는 가오슝의 옛 지명으로 한자로는 '打狗'이다. 왜 이런 지명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打狗를 풀이해 보면 '개를 때리다.'라는 뜻이었다. 일본지배시절, 일본인들은 이 지명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다거우'와 비슷한 발음인 '다카오(高雄)'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가오슝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러한 유래를 알고 '다거우영국영사관'을 방문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다거우영국영사관'에 갔다면 그냥 "이름이 특이하네."하고 끝났을 일인데,
역시 대만에 오기 전에 대만 관련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시즈완 해변을 따라 걷다가, 드디어 다거우영국영사관에 도착했다.
다거우영국영사관으로 올라가는 노란 벽과 진한 분홍색의 꽃의 조합이 참으로 산뜻했다. 계단 한 칸에 시즈완의 풍경 감상 한번.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시즈완의 바다 풍경이 싱그럽게 다가왔다.
"와, 너무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기, 혹시 한국분...이세요?"
시즈완 풍경에 푹 빠져 넋을 놓고 감상하던 중 뒤에서 익숙하고, 반가운 한국어 소리가 들려왔다.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당연하죠!"
4,50대 정도로 보이는 4명의 여성분들이었다. 서로 친구 사이인 듯, 사진을 찍는 내내 꺄르륵!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힘들지도 않으신지 신나게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분들의 웃음소리에 나까지 덩달아 신이 났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우정이 영원하길 이 자리를 빌려 기원해 본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녀들처럼 내 친구들과 다시 이곳에 방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99NTD의 티켓을 끊고, 드디어 다거우영국영사관 안으로 입장했다.
1865년에 지어진 다거우영국영사관은 영국이 가오슝에서 가장 전망 좋은 언덕에 지었다고 한다. 과연, 이 언덕을 찾아내서 영사관을 지은 영국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안목은 참 대단했다. 다거우영국영사관에서는 가오슝의 바다와 내륙을 360도 파노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좋으면 반대편에 있는 치진섬 가오슝 등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다거우영국영사관 내에 진열된 과거 영국인들이 실제 사용하던 물건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그림, 도표 등의 전시 자료를 몇 가지 살펴본 후 건물 내 카페에서 잠깐의 티타임을 하기로 했다.
애프터눈 티세트(2인)가 눈에 띄었다. 직원에게 혹시 나 혼자 2인 세트를 주문해도 되는지를 물어보았다. 직원은 가능하다고 하며, 음료가 2잔 나오는데 한잔은 이곳에서 마시고, 다른 한잔은 포장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었다.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는데, 생각보다 바닷바람이 너무 강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디저트를 먹고 싶었기에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추웠다. 결국 직원에게 부탁해서 다시 건물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3단 트레이에 곱게 담긴 디저트가 도착했다.
머랭쿠키와 샌드위치, 스콘과 크림브릴뤠, 가장 위에는 아기자기한 케이크와 젤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큼직한 과일이 듬뿍 들어간 과일차가 한 주전자 가득 나왔다.
나는 일단 카메라를 들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누가 들으면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호강을 누려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런 애프터눈 티세트는 더더욱 먹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이건 어떻게 먹어야 할까...
네이X에 급하게 '애프터눈 티세트 먹는 법'을 검색해 보았다. 1단부터 먹으면 된다는 글을 읽고서야 그제야 안심하고 애프터눈 티세트를 먹기 시작했다. (웃음)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와 청량한 과일차가 여행으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아! 행복하다.
달콤한 디저트, 시원한 차, 저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까지... 파란만장했던 지난 직장생활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 모든 일, 상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다 스트레스였고, 압박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들이 회사 내 책상에서 목이 빠져라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이렇게 여유를 부려본다. 대뜸 에프터눈 티세트 사진을 카카오X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보았다. 그들이 아직 나를 차단하지 않았다면 업데이트한 프로필에 내가 뜨겠지? 나는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곳을 나온 것이 정답이었어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보았다.
이것이 나의 작고, 소심한 복수이다.
tip: 다거우영국영사관에서 숲 속 계단을 통해 내려올 때 원숭이를 조심해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원숭이를 보지 못했지만, 여행객들 사이에서 이곳에서 원숭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제법 많다.
다거우영국영사관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슝전북문에 갔다.(도보 3분)
다거우영국영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치진섬과 함께 가오슝 항구를 지키던 곳이었다.
지금은 과거의 위세는 사라지고, 떠오르는 선셋 명소로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등대가 외롭게 바닷가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시즈완 바닷가를 구경하다가 다시 숙소에 들어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침까지 나를 괴롭히던 빈혈이 다시 재발했는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침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한국에서 미리 챙겨 왔던 핫팩을 하나 꺼내 이불속에 넣자, 금세 훈훈해졌다. 따뜻한 온기에 취해 까무룩, 잠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아까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상태가 나아졌으니, 숙소에서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다시 해 질 녘에 맞춰서 보얼예술특구 근처 부둣가로 가서 가오슝의 마지막 밤을 만끽했다.
여행을 하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이 소중한 시간에 감사하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게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게 된다.
아까 카카오X 프로필 사진에 애프터눈 티세트를 올려놓고, 전 직장 사람들을 비웃었던 몇 시간 전의 나를 반성했다. 이 값지고 소중한 시간을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데 할애하지 말자. 그들의 행동, 반응에 집착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분명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만, 그때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지.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둑어둑 해질 무렵 그냥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국수 한 그릇과 오이무침을 하나 시켜 먹었다.
보얼예술특구 근처에 있는 kw2를 한번 구경한 후,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보얼예술특구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사실 처음 가오슝에 왔을 때는 미리 예약해 놓았던 발레학원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평범하고 재미없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가오슝은 누구보다 잔정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해변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정겨운 부둣가. 하늘 높게 치솟은 빌딩들과 그 사이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풍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었다.
이대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웠다.
기왕 걷는 것, 조금 돌아가더라도 가오슝 발레학원에서 사귀었던 친구가 소개해준 雙飛奶茶까지 가서 밀크티를 한잔 하기로 했다.
아, 그 친구가 이야기 해준대로 쩐주(타피오카펄)가 아주 부드러웠다.
달콤한 나이차를 마시며 천천히 아이허를 건너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드디어 컨딩으로 떠나는 날이다.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