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타이중은 대만의 중부에 위치한 대도시 중 하나이다.
대도시라고 하면 크고 화려한 건물, 번쩍번쩍한 네온사인, 시끄럽고, 북적이는 도시의 소음을 떠오르게 되는데, 타이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도시였다.
내가 느낀 전체적인 느낌은 '아기자기'였다.
웅장하거나 큰 건물은 없지만, 좁은 골목길 곳곳에 피어있는 작은 꽃부터 시작하여,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건물들, 그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거리를 걸을 때마다 타이중에 대한 애정이 샘솟았다.
애니메이션골목을 지나 일부러 좁다란 골목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글맵을 보다가 문뜩 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속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이곳의 다양한 모습을 보러 온 건데, 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가? 에잇! 모르겠다. 그냥 길을 잃어서 더 이상 어떻게 가야 할지 도저히 모를 때, 그때 다시 구글맵을 켜기로 하고, 일단 걸었다. 그리고 녹음이 짙은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공원 바로 옆에 '타이중 문학 박물관'이라고 써진 팻말을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왔는데, 어떻게 타이중 문학 박물관을 찾아온 것이다. 이런 게 요즘말로 럭키비키인가 싶다.
조금 전 다녀왔던 국립대만만화박물관처럼 이곳도 일본의 전통 가옥을 그대로 보존한 채로 그곳에 대만과 타이중 현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된 책자와 글귀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는 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를 여행할 때는 종종 중국의 당, 현대 문학작품과 관련된 곳을 찾아가곤 했다. 그럼 그 지역이 최소한 10배는 더 재미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딱히 대만의 문학 작품을 읽어본 게 없었다. 그렇게 '대만, 대만' 노래를 불렀으면서 정작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자칭'대만러버' 실격이다.
대만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글을 몇 편이라도 읽어봤다면 이곳을 구경하는 게 더 즐거울 텐데…
대만과 타이중을 대표하는 문학가와 그들의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하니, 아쉽지만 금세 흥미를 잃었고, 그냥 그렇게 전시실 밖으로 나와버렸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대만의 문학 작품들부터 찾아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에 '나 혼자 산다.'에서 타이중이 나온 이후, 타이중은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핫한 여행지가 되었다.
그중에서 딩산은 이정우 씨가 박나래 씨와 전현무 씨를 데리고 와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은 곳인데, 특히 이미엔에 대해 극찬을 했던 곳이다.
먹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은 없는 나지만, 방송에서 그렇게 극찬을 한 곳인데… 그래도 타이중에 왔으니 한번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오전 11시 오픈이었는데, 마침 내가 갔을 때는 오픈 3분 전이었다.(럭키비키!)
의도치 않게 오픈런을 한 셈인데, 다행히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내 앞에 한 사람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가게 안에 들어가자 사장 아저씨께서 “코리안?”이라고 하시며 바로 한국어로 된 메뉴판을 주셨다. '나 혼자 산다'를 보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많이 왔던 걸까? 조금 웃음이 나왔다.
메뉴판과 함께 작은 체크리스트를 주셨는데, 거기에 먹고 싶은 음식을 체크해서 아저씨께 전해드렸다.
나는 고기완자(매운맛)와 이미엔을 시켰다. 잠시 후 사장 아저씨께서 음식을 가져다주셨는데 생각보다 그릇 크기가 작아서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먹어보니 은근 배가 불렀다.
고기완자는 전분으로 만든 것인지, 쫀득한 찹쌀떡 같은 식감에 안에 고기가 잔뜩 들어있었고, 무엇인가 소스가 얹어져 있었는데, 매운맛이라고 생각해서 먹어봤지만, 그다지 맵지는 않았다. 쫀득한 식감을 좋아하는 나는 이 음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저렴하고, 한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했다.
반면 이미엔은 참 오묘한 맛이었다. 내용물은 참 별거 없어 보이는데 칼국수 같은 면발에 달콤하면서 짭조름한 소스가 참 좋았다. 나는 반절쯤 먹고, 식탁에 놓인 매운 소스를 조금 넣어서 먹어보았다. 그냥 먹을 때도, 매운 소스를 첨가해서 먹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아주 착했다. 도합 90 twd! 한국돈으로 환산해 보니 채 4000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점심도 먹었겠다. 이제 다시 숙소에 돌아가 오후 투어를 준비하기로 했다.
밥을 먹었는데, 커피를 안 마시면 아쉬우니까, 85도씨를 들어갔다. 나는 원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소금커피로 유명한 85도씨에 왔으니 소금커피를 주문해 보았다.
85도씨 카페는 나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 유학을 할 때,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을 때마다 갔던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중국에서 카페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싶으면 스타벅X를 가야 했는데,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스타벅X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고, 학교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85도씨는 학교에서 가깝고, 가격도 무난했다. 무엇보다 함께 판매하는 디저트가 굉장히 맛있었다. 이제는 중국도, 대만도 커피 문화가 활성화되어 다양한 카페 전문점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85도씨는 나에게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커피전문점 중 하나이다.
나의 20대 추억이 듬뿍 담긴 소금커피를 한 모금 쭉 빨아들였다.
입안 가득 진득한 단맛이 맴돌고, 곧바로 짭짤한 맛이 혀 끝을 자극했다.
"으, 달다! 달아!"
마치 인생 같은 맛이다.
살다 보면 즐거운 날도 있지만 슬픈 날도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던 전 직장은 내 인생에서 아주 살짝 지나가는 '짠맛'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보다 살짝 짠맛도 있어야 단맛이 더욱 살아나는 것처럼, 어쩌면 인생도 즐거운 일만 가득한 것보다 중간에 한 번쯤 고비도 있어야, 인생이 더욱 달콤하고 맛있어 있는 게 아닐까?
소금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셔보았다.
앞선 짠맛 때문인지 단맛이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아, 내 인생의 짠맛도 지나갔으니, 이제는 단맛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