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넘고 물건너
"자, 여기가 민박집이야."
"4층까지 매일 걸어올라와야한다니... 만만치 않네."
"큭큭. 민박집 출근 뿐만 아니라 유럽 여행을 틈틈히 다니다보면 걷기 운동 하나 만큼은 제대로 될거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도 되긴 하는데 난 너무 좁아서 걸어올라오는게 차라리 낫더라고. 그래도 엘리베이터에 무거운 짐 같은 건 실어 올리면 되니까 다행이지."
"누나는 참 긍정적이야."
"긍정적? 그냥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며 사는거지 뭐."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인다라.. 멋진 말이네."
"뭐야, 싱겁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4층까지 도착한 두 사람. 미주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속으로 문득 희철이처럼 남동생 미후와도 티키타카가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현관 앞에서 희철이 미리 받은 직원용 열쇠로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번호키가 아니라 열쇠를 들고 가지고 다니며 문을 연다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었던 희철은 몇 번의 시도끝에 가까스로 문 열기에 성공했다.
'딸깍.'
"우와! 누나네 집보다 훨씬 좋은데?"
민박집에 들어선 희철은 굉장히 솔직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민박집이 훨씬 더 좋을 수 밖에 없었다. 크기부터가 넓어 개방감도 있었고, 발코니로 내려다보이는 골목뷰도 민박집이 훨씬 나았다. 더군다나 민박집은 미주가 틈틈히 모은 예쁜 인테리어 소품에 크고 작은 화분까지 더해져 더 포근한 느낌까지 들었다.
"여긴 돈을 벌어야하는 곳이잖아.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어."
"큭큭. 자본주의적인 발언이야."
희철은 아직 아무도 없는 민박집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꿈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영어공부하고, 다시 또 다 때려치고 호주로 훌쩍 떠났던 누나의 용기가 참 멋졌었는데. 이제 다시 만나보니 아주 자본주의의 노예가 다 되었네?"
"야. 꿈이라는게 결국 뭐니? 원하는 일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거잖아."
"헐... 누나가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사람의 신념이나 가치관은 변하는 거야. 영원한 건 없더라. 그리고 민박집을 운영하는 것도 내 꿈 중 하나였어. 물론,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인플루언서가 되어 유명해지고 퇴사해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은 인테리어 소품, 찍은 사진, 기념품들로 민박집을 꾸미는걸 원했었지만. 지금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잖아?"
"아, 누나가 민박집을 운영하고 싶어했었는지는 몰랐었어."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파리에서 민박집을 운영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요즘 기분이 좋아.
어디선가 읽었었는데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려보니 로마에 왔다고 실망하고 좌절하겠냐는 거야. 아니잖아. 로마에서의 시간을 즐겁게 보내야지, 왜 나는 파리에 못갔을까 우울해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잖아. 나는 내 인생이 그런 것 같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의도치 않게 엉뚱한 행선지에서 내려서 여행을 하는 것 같아."
"흐음.. 만약, 파리행 비행기를 탔는데, 아프리카 오지로 떨어지면 어떡해? 공항에 내리자마자 소매치기 당하고, 내전 중이면? 그런 상황에서도 즐길 수는 없잖아."
긍정적인 성격의 희철이었지만, 미주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지 반박을 했다. 어쩌면 자신의 상황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고 느꼈던 것 같다. 미주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뭐 거기서도 살 길을 찾아야겠지. 거기서 유튜브로 여행 브이로그 찍으면 대박이라도 나겠지."
"하하. 맞아. 나도 여기 있는 동안 유튜브나 해볼까?"
"하면 우리 민박집 홍보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
"좋아! 유튜브도 도전해보겠어!"
"영어 공부도 해야하고, 여행도 다녀야하고, 유튜브도 해야하고...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어?"
"걱정마.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정말 밀도있게 살아볼테니까."
야경투어 집결 시간까지 미주는 희철에게 부엌에 있는 식기류, 반찬들의 위치, 세탁기 사용법, 청소하는 법 등을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세금문제, 예약 확인, 장보기 등은 미주가 하기 때문에 희철이 해야할 일 중, 딱히 어렵거나 복잡한 일은 없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침구류를 교체하고, 세탁하는 등 반복적인 업무들이었다.
"이런 일이라면 군대에서도 많이 해봐서 쉬워. 너무 걱정하지마."
간단한 인수인계가 끝날 때즈음, 도미토리에 묵고 있던 여성 손님 4명 지연과 수희, 현아, 다솜이 민박집으로 들어왔다. 야경투어 집결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 더 남은 시간이었다. 20대로 보이는 손님들은 열심히 관광을 하고 오는 길이어서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아휴, 모두 고생들했어요. 여기 남학생은 제 조카 박희철인데, 민박집에서 오늘부터 스탭으로 일하기로 했어요. 나이도 비슷할텐데 남은 일정동안 잘 부탁해요."
"반가워요. 비쥬네 민박집에서 일하신다니 너무 부러운데요. 그런데 사장님, 저희 지금 라면 먹어도 되죠? 시간 괜찮죠?"
손님들은 희철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바로 라면을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래요. 아직 시간도 넉넉하니 먹고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기한이 인터넷 카페 <유럽유랑자> 후기를 보고 예약한 손님들은 자신들도 '저녁'을 제공받을 수 있냐고 종종 문의하곤 했었다. 점심이야 관광하느라 바빠서 시내에 있지만, 저녁은 민박집에서 편하게 한식으로 먹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때야 기자와 기숙이 민박집에 머물며 음식을 했고 또 하루였으니 이벤트 식으로 밥을 차려줄 수 있었지만 미주가 혼자 운영하는 상황에서는 조식 이상의 식사 제공은 힘들었다.
[셀프 봉지라면 5유로. 밥/깍두기/계란 제공.]
그렇게 해서 생각한 것이 셀프 봉지라면 판매였다. 라면은 짜장라면과 매운라면 두 가지를 비치해두어 선택의 폭을 만들어주었다. 작은 냄비 2개를 추가로 더 구매했고, 냉장고 안에는 계란과 깍두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체크했다. 라면으로 큰 돈을 벌 생각은 없었고, 단지 바게트와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하루에 만 보씩 걷는 여행객들을 위해 시작한 서비스였다.
이 서비스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한식을 먹고 싶지만 한식당 가격은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배낭여행자들은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민박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멤버에 따라 조용히 라면만 먹기도 하고, 와인이나 과자까지 곁들이며 일행끼리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라면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제한 밥과 깍두기 제공 때문인지 매일 라면을 끓여먹는 손님들도 많았고, 체크인을 하자마자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손님들도 생겨났다. 셀프 라면 서비스는 비쥬네 민박집의 매출 증가에 소소하게 기여했다.
"너도 라면 먹을래?"
"그럴까?"
손님들이 펄펄 물 끓는 냄비에 스프를 넣기 시작하자 얼큰한 MSG의 냄새가 부엌과 거실에 진동했고, 늦은 점심을 먹고 약간 출출해진 미주와 희철은 참기가 어려워졌다. 셀프 봉지라면 서비스는 강력한 냄새로 인해 한 번 누군가 끓여먹기 시작하면 한두명식 부엌으로 나와 끓여먹게 만들었고, 그렇게 매출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희철은 그런 손님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가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이기 시작했다. 라면이 먼저 완성된 여학생들이 냉장고에서 깍두기를 꺼내 작은 접시에 담고 식탁에 둘러앉아 먹기 시작했고, 곧 희철도 라면을 완성했다.
"우리도 여기서 같이 먹을게요."
"네, 사장님!"
미주와 희철도 식탁 한 쪽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비쥬네 민박집에서 먹는 라면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깍두기일거다. 라면 서비스를 시작하고 깍두기를 자주 담가야해서 번거롭긴 했지만, 알만게 익은 새콤매콤한 이 깍두기는 라면 맛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깍두기 정말 맛있다."
"그치? 내가 저번에 엄마랑 이모가 왔을 때 아주 제대로 배웠다니까."
희철 역시 깍두기를 먹으면서 감탄했다. 딱 기숙이 해준 깍두기 맛이었는데, 무 조각이 조금 더 크다는 차이가 있었다. 깍두기를 자주 담가야했던 미주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깍두기 조각이 커져버린 것이다. 희철은 조금 크긴 하지만 맛있는 깍두기와 라면 면발을 함께 씹으며 행복을 느꼈다.
"어머, 사장님께서 깍두기를 직접 담그신 거예요? 너무 맛있어요."
희철과 미주의 대화에 열심히 라면을 먹던 지연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맞아요. 저희가 1년 동안 제대로 된 한식을 못 먹었는데, 이 깍두기 덕분에 기운이 난다니까요. <유럽유랑자> 카페 후기 보고 급하게 숙소를 바꿨는데, 비쥬네 민박집에 온 일은 정말 제가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었어요."
"큭큭. 우즈베키스탄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잡채도 만들어먹고, 라면도 끓여먹고, 불고기도 해먹고 그랬는데. 맛이 좀 어딘가 2% 부족한 맛이랄까요? 그런데 비쥬네 민박집에서 주시는 조식도 그렇고 정말 너무 맛있어서 벌써 한국에 귀국한 것 같다니까요."
지연 뿐만 아니라 함께 여행온 수희와 현아도 공감하며 말을 보탰다.
"한국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이 있었는데, 그 메뉴 중 몇 개는 벌써 여기서 먹어봤다니까요."
"아휴, 그래요. 먼 나라에서 얼마나 고생 많았겠어요. 내일은 희철이가 한국에서 열무김치를 가지고 와서 비빔국수 할건데, 그것도 입맛에 맞으면 좋겠어요."
"우와, 열무김치요? 열무김치는 거의 2년만인데요?"
"맞아. 당근김치나 곁들여먹고 그랬지."
수희가 자신도 제대로 된 김치를 못 먹었다고 푸념하자 지연이 반박하고 나섰다.
"야, 그래도 넌 그래도 수도에 있어서 한식당도 있었잖아!"
"무늬만 한식당이지 맛이 어딘가 부족하잖아. 여기 비쥬네 민박집처럼 100% 한식이 아니라 한 70% 만 구현된 음식이었다고."
"됐어. 너가 한번 우리처럼 시골에 있었어야하는데 말이야."
세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라면은 한 그릇 씩 밖에 먹지 않았지만 깍두기는 벌써 3번째 리필하는 모습을 희철은 힐끔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아!"
그런 희철의 시선을 느꼈는지 수희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저희가 우즈베키스탄에서 1년 동안, 봉사활동을 하다가 왔거든요."